책임을 지는 자

날짜: 
2005/07/04
설교: 

룻4:1-12 책임을 지는 자
여성이 결혼배우자를 고를 때 살펴보는 것 중에 중요하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그 사람이 책임감이 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사원을 뽑을 때에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뽑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일에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 결과가 어떨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잘될지 안될지 모르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일은 항상 모험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기도 합니다. 자기의 삶이 더 무거워지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책임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되도록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려고 하고, 그러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을 지는 자로 처음부터 만들었습니다.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책임지라고 하셨습니다. 하와에게는 아담을 도우라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번성하고 충만하고 다스리는 책임을 가진 자로 지움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 때서부터 책임지는 자로 선택이 되었고, 그 맡겨진 책임을 잘 감당할 때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에 따르는 책망도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입니다. 맡겨진 책임을 잘 감당할 때 그 자유는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지만, 반면 맡겨진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에덴동산까지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룻기 3장 13절에 보면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친척으로서의 해야 할 세 가지 책임이 있었습니다. 첫째, 친척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면 그 죽음을 보복해주는 것이요. 둘째, 친척 중 누가 아들이 없이 죽어서 자손이 끊어질 것 같으면 가까운 친척, 예를 들면 형이나 아우가 제수나 형수와 동침하여 자손을 이어주는 것이요, 셋째, 친척 중 누가 가난하거나 피치 못할 형편으로 인하여 기업(땅)을 잃게 되면 가까운 친척이 그 기업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라는 여인은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 때 기업을 모두 팔고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이라는 나라로 이민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모압에서 남편도 병들어 죽고, 두 아들도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스라엘에 며느리인 룻과 함께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으로 이민갈 때 기업도 모두 팔고 갔으므로 가난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남편과 두 아들도 죽고, 자손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족보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있어 가장 절실한 것은 그 친척 중 한 사람이 자신들의 잃어버린 기업(땅)을 찾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친척이 그 기업을 찾아서 나오미에게 돌려주는 것은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것이 친척에게 주어진 책임이요 의무이지만 그 책임을 감당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보아스라는 사람은 죽은 나오미의 남편과 친척 되는 사람입니다. 즉 나오미의 잃어버린 기업을 찾아줄 수 있는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보아스라는 사람 말고 또 다른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보아스보다 나오미의 죽은 남편과는 더욱 가까운 친척입니다. 즉 보아스보다 먼저 친척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자기보다 가까운 친척에게 말합니다. “아무개여,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민갈 때 기업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당신이 찾아주겠소? 만약 당신이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책임을 감당할 친척은 나 밖에 없소.” 그러자 그 아무개가 생각하기를 나오미는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으니 그 기업을 찾으면 자기 것이 될 줄 생각하고 대답합니다. “오케이, 그렇게 하지요.”
그러자 보아스가 아무개에게 말합니다. “아무개여, 당신이 기업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먼저 시어머니가 달린 룻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해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면 당신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기업을 이을 자손이 되고, 그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 말을 듣자 아무개는 그것이 자신에게 상당한 손해가 되는 줄 알고 즉각 자신의 책임을 회피합니다. 본문 6절 말씀입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리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그러자 보아스가 책임을 집니다. 뻔히 손해가 될 것 같은 일이지만 감당합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룻과 나오미가 모압에서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다시 들어올 때 그의 본처가 죽었고. 룻과 결혼한 뒤에 보아스도 곧 바로 죽었다고 합니다. 즉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누린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책임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임지는 자들의 족보인 예수님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책임을 질 줄 아는 크리스천입니까? 아니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 책임을 회피하는 아무개라는 사람은 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까? 다름 아닌 인간적인 계산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룻이 아들을 낳으면, 나는 손해 본다는 계산입니다. 내가 땅을 얻기 위해 돈을 내었는데, 룻의 자녀가 그 땅을 가져가면 나는 돈을 잃은 것 밖에 되지 않기에, 그는 더 이상 룻을 감당하는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산에 의해서 책임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계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산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하고난 후에 계산에 입각한 행동을 취하지 말고, 믿음에 입각한 행동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계산해 보면 희생하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은 분명 힘이 드는 일입니다. 물질이 손해나고, 시간이 손해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계산에 입각하여 못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입각하여 어려운 일이라도 감당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크리스천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였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예수님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배가 고픕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 많은 무리들을 돌려보내자고 했습니다. 각자 알아서 해결하게 하자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책임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이들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느끼셨습니다. 이들이 동네까지 가다가는 배가 너무 고파 힘들 것 같아서, 이들을 먹이려는 책임감으로 강렬하셨습니다. 이러한 강렬한 책임감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자기의 백성에 대하여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목자가 책임을 지고 양을 돌보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책임지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책임감에 대하여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강도를 만나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며, 정성껏 치료를 해주고, 더 들어가는 비용까지도 책임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책임을 지는 사람을 책임져주시며, 책임지려는
사람을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아스가 룻을 책임지겠다고 말하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이 하시기를 원하노라.”(룻4:11-12)
아시다시피 룻이란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멸하는 이방의 모압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시어머니를 책임지려고 이스라엘 까지 이민 오고, 늙으신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이삭을 줍는 천한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룻이란 여인을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와 레아와 같이 영광을 누리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책임지니 하나님이 룻을 책임져 주시는 것을 봅니다. 또한 책임을 지는 보아스도 유명해 진다고 말씀합니다. 보아스는 원래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짐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이 되어 성경에까지 그 이름이 나오게 되어 보아스는 정말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책임을 회피한 사람은 그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다만 ‘아무개’라고만 표현을 합니다. 즉 책임을 회피하는 자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복 받을 기회, 복을 나눌 기회, 후손들에게 복을 전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임을 지는 자를 축복하시고, 책임을 지는 자를 칭찬하시고, 책임을 지는 자를 책임지십니다.
그런데 책임은 지지 않고 자유만을 누리려는 남편, 좋은 남편이 아닙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자유만 누리려는 아내, 바람난 아내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자유만 주장하는 자녀, 방탕한 자녀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권력만 휘두르는 권세자, 폭군에 불과합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권리만 찾으려는 지도자, 탐욕의 이리에 불과합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자유와 축복만 갈구하는 성도, 기복주의자에 불과합니다.
대저 인류의 발전은 성실하게 책임지는 자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반면 인류의 파괴는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영국의 웨일즈라는 한 시골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곳에 사는 한 과부가 어느 날 밤, 자기 아기가 위독하다고 10km를 걸어와 의사에게 왕진을 요청했습니다. 그 의사는 처음에는 가봤자 가난한 과부에게서 사례 받는 것도 문제고, 또 안 간다면 아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이해타산보다 의사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서둘러 준비하고 시골길을 걸어 급히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의사의 도움으로 아기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장성하여 영국 수상이 된 로이드 조지입니다. 한 의사의 책임감이 영국의 수상을 살린 것입니다.
반대로 무책임이 낳은 재앙입니다. 1923년 영국에서 대서양을 횡단하는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들이받아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그 곳에서 불과 50㎞ 떨어진 곳에서 캘리포니아호가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사고현장으로부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자 타이타닉호 무선사들은 필사적으로 구조요청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호에도 무선사 한 사람이 타고 있었으나 그는 무전기를 꺼놓은 채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호는 대형 참사를 까맣게 모른 채 항로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만약 무선사가 무전기를 켜 놓았더라면 타이타닉호의 참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선사 한 사람의 무책임이 엄청난 희생을 낳은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당신 한 사람이 책임을 회피할 때,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에 재앙이 일어납니다. 당신이 책임지는 자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 안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 한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될 때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교회는 아름답게 가꾸어집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주께서 허락한 책임을 잘 감당함으로 보아스와 같이, 룻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