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만났습니다. 둘은 아주 재미있게 놀다가 그만 저녁이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이제 Bye Bye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합니다. “하루살이야, 우리 내일 또 만나서 놀자.” 그러자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사이가 물었습니다. “내일이 뭐야?”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는 내일이란 개념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 진짜 내일이 되니까 하루살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루살이 친구를 잃은 메뚜기는 너무 슬펐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메뚜기는 좋은 개구리 친구를 만났습니다. 둘은 아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오늘도 놀고, 내일도 놀고, 그렇게 열심히 놀다 보니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어느덧 추운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아쉽지만 또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말합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만나서 다시 놀자.” 그러자 메뚜기가 어리둥절해서 물었습니다. “내년이 뭐야?”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한해 한철 밖에 살지 못하는 메뚜기는 내년이란 개념을 알지 못했습니다. 개구리가 너무나 답답해서 메뚜기에게 이리저리 설명합니다. “응, 내년이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또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것을 내년이라고 해.” 그러자 메뚜기는 고개를 꺄우뚱하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차원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있기 전인 과거에도 있었고, 인간 역사가 진행 중인 현재도 계시고, 인간 역사가 끝나는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보기에 이러한 수백 수천 수만 년의 긴 세월인 과거 현재 미래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여러분, 시간에는 여러 종류의 시간 개념이 있습니다. 첫째,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1년은 365일, 하루는 24시간과 같은 물리적 현상은 태양과 지구가 잘못되지 않는 한 변함이 없습니다. 둘째, 심리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같은 24시간 하루라도 어제는 고통스러운 하루였을 수가 있고, 오늘은 보람된 하루였을 수가 있고, 내일은 아주 행복한 하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즉 개인이 처한 여러 가지 조건과 감정에 따라서 느끼는 시간입니다. 셋째 신앙적인 시간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물리적인 시간이나 심리적인 시간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시간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보다 더 잘 믿기 위해서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언제 그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 언제 그 약속이 성취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바라만 보고 있으실 건가요?” 하나님, 언제 저는 시집(장가)갑니까?“ 이렇게 ”하나님, 언제?“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1:6)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지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라와 민족의 해방은 너무나도 중요한 관심사요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시기에 대하여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 우리가 사용하는 물리적인 시간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어떤 조건이 성립이 되면 이스라엘이 독립이 된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이 민망할 정도로 너무도 냉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 이 말을 오늘날의 말로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너희는 몰라도 돼.”
“아니- 주님, 저희가 좀 알면 안 됩니까? 그렇게 비싸게 구시지 마시고 좀 가르쳐주세요. 그래도 저희들은 명색이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아- 너희는 몰라도 된대도.” 혹시 여러분 중에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보신 분이 있을 겁니다. “주님, 언제요?” 이때 주님이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시간으로 응답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너희는 몰라도 돼.”라고 하시든지 아무 대답도 안 해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좀 답답하지요. 그러나 때와 기한에 대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확한 년도와 날짜를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재림의 때가 아직 먼 시대에 산 과거의 사람들은 “에이, 예수님 오실 날이 아직 멀었어. 아직 많이 남았다고. 그러니 좀 천천히 믿자.” 하고 나사 빠진 것처럼 신앙이 헤이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가 보다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조차 “에이, 예수님 오실 날이 아직 두 달이나 남았어. 그러니 재림 하루 전날까지는 먹고 마시고 취해도 돼.” 하고 역시 기회주의 신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즉 주님이 우리들에게 때와 기한을 가르쳐주지 않아야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들에게도 더욱 유익이 될 때에는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와 기한을 가르쳐줘도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아예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앞서 하루살이가 메뚜기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메뚜기가 개구리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가르쳐주시지 않고 침묵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라고 하는 여러분의 질문에 하나님이 침묵하실지라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혹시 하나님이 “너는 몰라도 돼.”라고 말씀하실지라도 기분이 나빠하거나 삐치지 마십시오. “아하, 그렇구나!”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아- 물론 하나님이 우리들의 기도에 우리가 사용하는 물리적인 시간으로 구체적으로 응답해주시면 그것은 땡큐, 감사하면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주님이 오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환경은 더욱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의심이 듭니다.
“아니,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했는데 왜 아직도 안 오시는 거야? 혹시 예수님의 재림은 그냥 우리들을 위로하려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야?” 이때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즉 주님이 곧 오신다는 하는 ‘곧’은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는 일 년이나 이 년 혹은 길어봐야 백 년 안쪽입니다. 왜냐하면 백 년이면 사람들은 거의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곧’이라는 시간 개념은 수천 년도 되고, 수만 년도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000년이 되면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2020년입니다. 2000년 하고도 20년이 더 지나간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오시자 않았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진짜 다시 오시기는 것이 맞습니까?
이때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여러분, 종종 우리는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더 중요한데 그 일은 하지 않고 내일의 때와 기한에만 너무 마음이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는 총각 처녀 여러분,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도대체 언제 결혼을 하는 건가요?”
이 질문에 제가 주님을 대신해서 대답해 줄까요? 말까요?... “때가 되면 결혼합니다.” 그러니 너무 초조해지지 말고, 들뜨지도 말고 현재에 더욱 충실하십시오.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엄마,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현재 자신을 더욱 가꾸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에게 맞는 배우자를 ‘곧’ 주실 겁니다. 할렐루야!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서 살다가 외삼촌의 딸 라헬을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했습니다. 어느 날 외삼촌에게 자기의 속내를 털어놓고 라헬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외삼촌은 고이 키운 라헬을 아무 대가도 없이 줄 수 없다고 7년을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7년을 수일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창세기 29:20절의 말씀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7년이란 긴 세월이 며칠처럼 여겨질 정도로 지겹지 않았고, 도리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사는 것이 지겹지는 않습니까? 사는 것이 지루하거나 따분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사는 것이 괴롭고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루가 천년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빨리 오늘이라도 당장 하늘나라로 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이런 분들은 “내가 지금 누구와 사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사납고 못된 아내, 평생원수인 지긋지긋한 남편하고만 산다면 사는 것이 당연히 힘들 겁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혹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사람하고만 같이 산다면 하루가 천년같이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같이 산다면 인생은 괴롭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즐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천년이 하루 같을 수 있습니다.
즉 누구와 어떤 태도로 사느냐에 따라서 같은 인생의 시간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탁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사십시오. 천년을 살아도 역시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러기 위해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십시오.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혹 이에 대하여 이해가 잘 안되더라도 선하신 주님이 때와 기한을 알아서 잘 해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시며 삶의 보람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