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희로애락

날짜: 
2006/02/26
설교: 

약1:2-4 크리스천의 희로애락
어느 장례식장에 시체 세 구가 있었는데 한결같이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세 사람 모두가 크게 웃다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을 때에도 즐겁게 웃으면서 죽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보통 죽을 때에는 고통스럽게 울면서 죽는 것이 정석인데 세 사람 모두가 웃다가 죽었으니 필경 무슨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로또 복권이 당첨이 되어 너무 기뻐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들이 삼수를 해서 서울대학에 합격하여 너무 기뻐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었습니다. 번쩍할 때 사진 찍는 줄 알고 '치즈'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 세 사람 모두가 웃으면서 죽었지만 모두가 씁쓸한 웃음입니다.
그러나 영화 쿼바디스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가 크리스천들을 원형경기장에다 가두어 놓고 그들로 사자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친히 사자 밥이 되어 찢겨진 그들의 시체를 관찰하러 내려옵니다. 그런데 네로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옵니다. “어, 이것들이 웃고 있네!” 즉 크리스천들은 사자 밥이 되어 죽을지라도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사랑하는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동물들과 사람들의 희로애락에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과 세상 사람들의 희로애락에도 좀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희로애락의 시기와 대상, 즉 언제 무엇 때문에 희로애락을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희로애락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플 때 먹이감이 생겼다. 갑자기 눈이 밝아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반대로 자기 새끼가 먹이감이 되어서 찢겨죽었다면 매우 슬퍼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사람들도 공통적일 것입니다.
즉 동물이나 사람이나 자신의 필요와 욕구가 채워지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특히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 즉 의식주가 채워지면 희락이 오고, 의식주가 없어지면 슬퍼지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어머니의 품이 희로애락을 좌우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작은 장난감이나 동화의 세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만화영화를 보면 즐거워하고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학생이나 청년이 되면 더 이상 장난감이나 만화영화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친구나 연인관계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채팅을 하거나,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거나, 농구나 스포츠를 하거나, 퇴폐적인 학생들은 노래방이나, 인터넷 게임과, 혹은 좋지 못한 사이트를 드나들면서 희락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인이 되면 남녀의 결합이라는 결혼을 통해 희락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희락을 얻기 위한 추구를 합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돈을 많이 갖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돈이 자신과 가족들의 희락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인간에게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진정한 희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희로애락은 언제였습니까? 저의 경우에 가장 기쁠 때는 26살 때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당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성령으로 오신 하나님이 내 안에 오신 체험은 평생 잊지 못할 가장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슬픈 일도 있었고, 화가 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전의 희로애락과 믿은 후의 희로애락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연수가 더해지고 변천됨에 따라서 희로애락의 차이가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기독교는 기쁨과 희락의 종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고, 불교는 초상집과 같고, 유교는 제삿집과 같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되었을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마귀에게는 화가 나고 슬픈 소식이겠지만, 모든 인류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기쁜 소식을 받은 사람들이요,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외국 땅에서 살다 보면 여러 가지 힘이 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것이요, 그로 인하여 마음이 우울하고 슬퍼지고 화가 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과 우울과 분노를 오래 간직하지 마시고, 천사가 전하여준 기쁜 소식의 근원인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도 기쁨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즉 슬픔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걱정과 근심과 절망 중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일생 동안 3000여개의 발명품과 1000여개의 특허품을 낸 에디슨은 어른이 되어서도, 죽기 전날까지도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에디슨을 염려하자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연구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세요. 즐겁게 논다고 생각하세요. 책과 함께 놀고 시간과 함께 놀아요. 숙제와 업무도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세요. 직장 상사를 만날 때도 그것을 즐기세요. 거래처의 사람을 만날 때도 즐긴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이 순간 제 자신을 생각해볼 때, 저는 평생 즐기면서 지낸 것 같아요. 일과 연구를 즐긴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일에 파묻혀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즐거움을 찾아냅니다. 가식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살라고 하셨기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나를 즐겁게 하려고 하는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므로 우리는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
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왜냐하면 시험이라고 하는 슬프고 화가 나는 소식은 나중에 보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기쁜 소식은 기뻐서 좋고, 슬픈 소식은 기쁘게 되어서 좋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도 이렇게 크리스천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고후6:10) 할렐루야!
영국 옥스퍼드 의과대학 연구팀은 어린아이와 어른의 웃음에 대해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년이 되면 이 웃음은 하루 15∼20번으로 감소된다고 합니다. 즉 인간은 기쁨과 웃음 속에서 태어나고, 점점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며 끝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그렇게 기쁨 속에 잘 웃던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기쁨을 상실한 채 웃음을 잃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삶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오는 불안과 염려 때문입니까? 하지만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들 가운데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람이 하는 걱정 중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결국 사람들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날을 모르기에 슬퍼하지 않아도 될 것을 슬퍼하고, 화를 내지 않아도 될 것을 화를 내고,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 더 오래 살고, 신앙생활을 조금 더 오래 하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시간이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혹시 ‘새옹지마’라는 말을 들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옛날 중국의 변방에 새옹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던 말이 그만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새옹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이고, 얼마나 슬프십니까? 그러자 새옹이라는 노인은 그리 슬퍼하지도 않고 대답합니다. ”어허, 그럴 수도 있지! 두고 보아야지!“
그런데 얼마 후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달아난 새옹의 말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짝짓기를 해서 아주 훌륭한 신랑 말을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새옹에게 말을 합니다. “아이고,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그러자 새옹이라는 노인은 그렇게 기뻐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허, 그럴 수도 있지! 두고 보아야지!”
그런데 새옹에게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새옹에게 다가와 말을 합니다. “아이고, 얼마나 슬프십니까? 그러자 새옹이라는 노인이 그렇게 슬퍼하지도 않고 대답합니다. “어허, 그럴 수도 있지! 두고 보아야지!”
그런데 얼마 후 오랑캐가 그 나라에 쳐들어와 나라에서 새옹이 사는 동네의 젊은이들을 모두 병사로 뽑아서 전쟁터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터에 간 동네 청년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에서 떨어져 다리병신이 된 새옹의 아들은 불구가 되어서 병사의 모집에서 빠지게 되었고,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인생살이가 슬픈 것이 나중에 기쁜 것이 되기도 하고, 기쁜 것이 나중에 슬픈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진리 가운데서 오래 하다 보면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합력하여 좋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화가 나다가도 기뻐지고, 슬퍼지다가도 기뻐지고, 근심하다가도 기뻐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잠시잠간의 희로애락은 저 영원한 세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웃는 자가 진짜 웃는 것이요, 영원한 천국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자가 진짜 승자요 행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리는 세상적인 기쁨과 즐거움은 잠깐이요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
여러분, 사람들은 나름대로 희로애락을 느낍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희로애락을 느끼는 시기와 대상과 표현에 있어서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들과 아주 다릅니다. 우리는 헛되고 헛된 것에 우리의 감정이 그렇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으로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금 더 세월을 멀리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죽음이라고 하는 저 너머의 시간도 생각하며 희로애락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슬프거나 화가 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이렇게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자여, 시험을 당할지라도 온전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결국 그 모든 것이 너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