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길, 험한 길, 주의 길

날짜: 
2021/07/17
말씀: 
출13:17-18
말씀구절: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설교: 

제가 20대 중반에 성령세례를 받은 후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때 꾼 꿈 중에 이런 꿈이 있습니다. 제법 큰 쓰레기 처리장이 보였습니다. 여러 종류의 쓰레기가 있었고, 지독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쓰레기를 태우느라고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쓰레기 처리장에서 큰 상자 한 개를 꺼내서 옆에 있는 잘 포장되고 좋은 길가에 놓았습니다.

그 박스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성냥과 이쑤시개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꿈을 꾸고 난 후에 이게 어떤 계시가 있는 꿈인 것은 같은데 도저히 해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성경에다 이렇게 기록을 해놓았습니다. “쓰레기, 길, 성냥, 이쑤시개” 그리고는 언젠가 주님이 깨달음을 주시면 해석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이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해석은 이렇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던 너 김원효야,(아- 그렇지! 나는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지.) 내가 너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의 길에다 옮겨 놓았다. 고로 너는 이 주님의 길을 따라 성냥으로 불을 붙이듯 성령의 불을 붙이고 다녀라. 그러면 너에게 이쑤시개가 잔뜩 있을 것이다.”

여러분, 이쑤시개는 고기나 음식을 먹고 난 다음에 사용합니다. 맹물 마시고 이를 쑤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즉 이쑤시개는 먹고 마시는 삶을 윤택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좀 더 개인적으로 말하면 저는 야채보다 고기를 좋아합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다 좋아합니다. 즉 주님의 길을 따라 주의 일을 하기만 하면 고기를 실컷 먹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먹는 것, 고기 가지고 미끼를 쓰듯이 하나님이 저를 주의 일꾼으로 부른다는 것이 좀 유치하고 저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주님이 저에게 아주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약속이기도 합니다. 저의 시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먹고 사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고기를 실컷 먹고 산다는 것은 상당히 부요한 삶이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꿈대로 저는 고기를 참 많이 먹었습니다. 특히 이곳 캐나다 앨버타에는 비프가 참 유명합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저희 교회에서 성도님들이 다 같이 매주 불고기를 먹었습니다. 거의 20년을 매주 먹었습니다. 너무나 지긋지긋하게 먹어서 어디 식당가면 불고기는 절대로 주문하지 않습니다. 진짜 꿈대로 이쑤시개가 잔뜩 생겼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든 분들이 다 이런 약속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주님의 길을 가면서 도리어 배고프고 굶주리면서 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 험하든지 편하든지 간에 주님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동차가 있는 사람들은 자주 자주 길을 찾곤 합니다. 20년 전에만 해도 낮선 곳을 가기 위해서는 종이 지도를 통해서 찾았었는데 요즘은 구글 맵(Google Map)이나 내비게이션을 통해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공위성을 통하여 실시간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러다보니 현대인들은 빠르고 편한 길에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조금이라도 길이 늦어지고 불편하면 짜증이 납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 각자의 인격형성이나 신앙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즉 말세의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편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빨리 이루려고 합니다. 고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즉 그들은 편한 길만을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아마 현대인들에게 이 말씀대로 인생을 살 때 편한 길로 가지 말고, 험한 길로만 가야한다고 하면 그만 낙심하고 믿음을 포기하는 분들도 제법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물론 편한 길은 잘못되고 주님의 길이 아니고, 험한 길만이 바르고 주님의 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그 길이 주님의 길이고, 우리는 반드시 그 길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면서 길이 험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상에는 차가 다니는 차로가 있고, 바다나 하늘에도 배나 비행기가 다니는 항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의 길을 지날 때 반드시 그에 맞는 교통 규칙을 지키면서 다닙니다.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사고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주님이 인도하는 인생의 길을 가면서 그 길이 좀 험한 길일지라도 반드시 주님의 원하시는 규칙을 지키면서 가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치가 좋은 지중해를 끼고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가장 빠르고 편한 길입니다. 빠르면 4일이면 갈 수 있고, 좀 쉬었다 가더라도 일주일이면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갈 때 이 길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길은 멀고도 험한 홍해의 광야 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두 갈래의 길 앞에 섰습니다. 자- 그들은 어느 길로 가야할까요? 물론 당연히 경치 좋고 빠르고 편한 길로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어떤가요? 도리어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급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출13:17-18)

블레셋 사람의 길, 즉 지름길은 쉽고 가까운 대신 그 길목에는 일찍이 철기 문화를 발달시켜 각종 철 병기로 무장하고 서로 동맹을 맺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블레셋 족속의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과 같은 다섯 개의 큰 도시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아직 출애굽 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조직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고 군사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막강한 블레셋 군대와 맞부딪치게 되면 쉽게 낙심하고 절망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었겠지만 믿음이 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낙심하고 시험에 들것을 우려하셔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 길로 가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1차 목적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산(시내산 혹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출3:12)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거주하면서 400년 동안 중단됐던 예배를 드리게 함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 길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 길에서 만나는 모든 장애물, 그리고 환난과 시련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을 훈련하는 도구였습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단련되고 성숙해진 믿음의 소유자가 받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단 없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그곳에서 더 많은 죄를 저지르고 속히 멸망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하여 갈 때 에돔 지방을 관통하는 아주 빠르고 편한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일명 ‘왕의 대로(King's Highway)'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고속도로입니다. 그런데 에돔의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대로로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 참, 야박하게 굽니다.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로 오면 전쟁을 불사하고 죽이겠다고 합니다. 아- 광야 길이 힘들어서 좀 더 빠른 길로 가려는데 에돔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즉 내가 힘들게 인생길을 지나갈 때 그 사람이 나를 조금만 도와주거나, 가만히 있기만 해줘도 좋은데, 같은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녀석이 더 나를 힘들게 하는 겁니다.

확- 그냥 한 대 때려주거나 꼬집어주고 싶습니다. 대판 싸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형제 족속인 에돔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그냥 먼 길로, 험한 길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아- 아직도 가나안 땅은 갈 길이 먼데 또 돌아가야 합니다.(하나님, 이러다가 그냥 인생 끝나고 말아요. 좀 빨리 갑시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갈 때도 하나님은 이와 같이 멀고 험한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편한 길, 지름길 놔두고 굽이굽이 돌아서 험한 길로 가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때 자신의 인생길이 험하고 멀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큰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그러므로 지금은 나의 인생길이 재앙 같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아 보여도 그 길의 끝에는 소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편한 길, 지름길이라도 그 길이 저주의 길이 될 수 있고, 험한 길, 돌아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도리어 축복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름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게 하였습니다.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길이 좀 험하더라도 늘 감사하고 행복하게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