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07/12/15
설교: 

레17:11 피
‘피(Blood)'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윽- 왜 아침부터 목사님은 피 이야기를 하느냐?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무서워진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피가 무섭든 안 무섭든 우리는 누구나 몸에 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 “나는 매일 우유를 큰 컵으로 한 잔씩 마시기 때문에 내 몸에는 피가 아닌 신선한 우유가 흐르고 있다.”고 하시는 엉뚱한 분은 없겠지요?
이렇게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피는 응고되는 것에 따라서 A형, B형, O형, 그리고 AB형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ABO식 혈액형’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에는 이 혈액형으로 성격을 알아맞히기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행처럼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해석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혈액형에게 좋으면 괜히 나는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해석이 별로 좋지 않으면 괜히 기분이 나빠지고, 거기에다 누가 옆에서 “아하, 너 그렇게 성격이 나쁜 것을 보니 혈액형이 그래서 그렇구나!”라고 은근히 눈치를 주면서 말하면 상당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이, 누가 그런 것을 만들어서 괜히 기분 나쁘게 하고 그래! 혈액형으로 성격을 판단하는 것은 과학적이 아니야?”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이전에 ‘B형 남자’라는 이름의 TV 연속극도 해서 괜히 B형 혈액형을 가진 남자는 성격의 콤플렉스가 있어서 연애도 잘 못하고 여성들이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에 B형 혈액형을 가진 남자분이 있습니까? 그래서 ‘B형 남자’ 같은 TV 연속극을 보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혈액형으로 성격을 알 수 있다 없다하는 논란이 많이 있는데 혹시 누가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상당한 업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러분이 과학자가 되어 피를 만들 수 있다면 분명히 노벨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은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지고 인류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인공심장도 만듭니다. 그러나 만들기에 간단할 것 같아 보이는 피는 단 한 방울도 만들지를 못합니다.
피는 우리의 살아 있는 몸에서만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이 피는 심장의 펌프질로 동맥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온몸을 순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는 우리의 온몸을 순환하면서 산소를 공급하고, 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제거하고, 노화된 세포를 교환합니다. 그리고 오래된 피는 소변이나 땀의 형태로 노폐물과 함께 몸 밖으로 배출이 되고, 또 호흡을 통해 연소되기도 합니다.
한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보면 피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 하나님의 생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누가 성경을 보면서 피를 모르면 감히 성경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에는 피에 대하여 굉장한 분량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그리고 히브리서 9:22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짐승이 우리 대신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할 것을 수없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수많은 짐승이 죽어갔고,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는 늘 짐승의 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동물의 죽음, 동물의 피로는 우리 인류의 죄를 속하기에 완전한 피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 없는 사람의 피인 예수님의 피로 대체가 되어야만 속죄가 가능합니다.
쉽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피가 모자라서 죽게 될 때, 같은 혈액형의 피를 수혈해야지 다른 혈액형의 피를 수혈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짐승의 피는 인간의 피와 달라서 짐승의 피를 인간이 수혈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를 속하여 생명을 다시 불어넣기 위해서는 죄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아닌 다른 피로서는 죄가 속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 중에 가장 귀하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핵심적인 일은 바로 예수님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피를 흘리고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속죄, 우리의 구원은 성취되지 못하고 맙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이 땅에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을지라도 피를 흘리며 죽는 일이 없었다면 그 모든 기적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여러분, 혹시 피를 흘려본 경험이 있습니까? 물론 누구나 코피쯤은 한번쯤 다 흘려보았겠지요. 그리고 여성이 되면 누구나 월경을 통하여 피를 흘립니다. 만약 많은 피가 우리의 몸에서 빠져 나가면 결국 죽고 맙니다. 그래서 피를 많이 흘리면 생명이 위독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 옆에서 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리면 긴장이 됩니다. 무서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포 영화에는 항상 피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피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겁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피를 통하여 죄가 사해지기 때문에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저는 월요일 꿈속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깬 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꿈속에서 사람이 죽으면서 흘리는 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 3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극장같이 생긴 조그만 방에 깡패들이 대여섯 명이 관중석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조그만 무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몇 명의 깡패가 한 사람을 데리고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그 사람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온몸에 밧줄이 묶여져 있었습니다.
갑자기 무대에 있는 깡패들은 무대 앞에 구경하고 있는 또 다른 깡패들 앞에서 데리고 온 그 사람을 무섭게 공격했습니다. 칼로 찌르고, 온몸을 찢고.... 마치 육식 동물이 먹이를 공격하듯이 그렇게 그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 조그만 무대에는 온통 피가 튀기고, 그 피가 홍건이 고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끔직하고 잔인한 장면을 도저히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내 토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장면이 바뀌어 아주 황량하고 추운 산악 벌판이 보였습니다. 아주 음침한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그곳을 보니 5-6천 마리나 되는 광야의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기도 하며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소름이 끼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황량한 산을 어떤 흰 옷을 입은 의사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의사는 산을 넘어 마을에서 의술을 베풀려고 왕진을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한방의사가 죽어야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 보니 그 흰 옷을 입은 의사가 그만 아무도 없는 산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일으켜 보니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두 제사장이 그 시체를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그 시체를 토막 내기 시작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번제의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칼자국이 난 시체에서는 피가 나옵니다. 그 피가 제단에 흥건히 적셔집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시체에서 내장을 꺼냅니다. 그 내장을 하나님께 태워서 제물로 드리기 위함입니다.
저는 그 내장이 꺼내지는 끔직한 장면을 보면서 또 다시 그곳을 도망치듯 나와서 토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시간을 보니 새벽 예배에 갈 시간입니다. 저는 새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성전에서 멍하니 한 시간 반 동안 앉아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캘거리 목사님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북한 라진에 유치원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셨던 김창선 선교사님도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캐나다로 오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북한 라진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김재열 선교사님이 북한 당국에 체포감금이 되어 한 달이 되어도 풀려나지 않고 아무도 면회를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이러한 꿈을 꾸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꿈을 통하여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다른 사람이 살 수가 있겠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살 수가 있는 것은 예수님이 피를 흘리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가 생명을 살린다는 법칙에 따라 그 피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여 포도주로 성찬식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죽음의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외쳐보십시오. 그 피가 외쳐지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피가 외쳐지면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 피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피를 흘리며 죽으러 오셨습니다. 마치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여러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의 몸을 던져 죽은 열사와 의사의 희생이 있기에 나라가 지켜지고 그 후손이 살 수가 있습니다. 희생이 없으면 생명은 위기 때에 죽고 맙니다.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 혹은 가족 식구들의 희생이 없으면 그 가정은 위기 때에 죽고 맙니다. 물론 희생이란 단어,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피를 흘리며 죽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이기적이 사회에서 쉽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끔찍하게 죽는다면 그 길을 가기가 꺼려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로마의 형틀입니다. 즉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 귀걸이 하고 다니시는 분들은 이런 비장한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비장한 각오 없이 그냥 십자가를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붉은 희생의 피가 묻어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죽음의 비명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십자가의 형틀을 지고 나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하고 자문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저도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세요.” 하고 기도도 해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는 살았습니다. 이제 누가 또 피를 흘려야만 내 형제가 살 수가 있다면 우리는 또 다시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너무 원색적이고 너무 무거운 분위기를 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피가 있기에 우리에게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피가 있기에 우리가 이 외국 땅에서 살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내 기도 소리 들으사 다 허락하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찬18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