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도 말 못할 사정이 있는가?

날짜: 
2022/02/19
말씀: 
눅12:49-50
말씀구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설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며? 전지전능하시다며?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도 다 아시고 있었다는 건데. 아니,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해야지.

그걸 따먹도록 방조하고 난 후 나중에 ‘네 이 놈! 너 선악과 따먹었지. 너 죄를 지었지. 그러니 저주를 받아라. 죽어라. 지옥가라.‘ 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은 아주 나쁜 하나님이 아니냐? 나는 그런 나쁜 하나님을 도저히 못 믿겠다.“

또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너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며? 전지전능하시다며? 그러면 천사장 루시퍼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 1/3이 하나님을 반역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건데.

아- 그러면 그런 반역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았어야지, 그 반역을 방조하고 난 후, 그들을 쫒아내서 무저갱이란 고통의 감옥에 가두시고, 영원한 지옥에 던져버리다니! 아- 그건 하나님이 너무 한 것 아니야? 그렇게 함정을 파서 그 함정에 빠지게 하는 나쁜 하나님을 나는 못 믿겠다.”

즉 하나님의 속성인 그 분의 전지전능하심과 그 분의 선하심이 서로 충돌이 되는 모순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더구나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전쟁을 참 많이 합니다. 어찌 보면 전쟁광 같습니다. 사람이 참 많이 죽습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의 성경을 보면서 불신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라면 그런 전쟁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았어야지. 전쟁이 일어나도록 방조하고 난 후, 나중에 하나님이 그 전쟁에 뛰어들어서 칼을 휘두르시다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시다니! 그거 나쁜 하나님 아니야? 나는 그런 나쁜 하나님 못 믿겠다.“

이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서 하나님을 방어해줍니다. “아- 구약시대는 예수님이 아직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이잖아.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저주의 율법이 작동되는 원리고, 신약 시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시켜주셨기 때문에 은혜가 작동되는 원리야.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자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거야? 아시겠어요?”

그런데 불신자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 신약 성경인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면서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을 죽이시는데...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아니, 뭐 이런 살인마가 있습니까? 이건 히틀러보다 더하지 않습니까? 보세요. 이건 구약이 아니라 신약이라구요?”

“아- 그러네요.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요?”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실히 맛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에도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이해가 안 되는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지전능하심에 의심이 들 때에도 “아- 하나님이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으시겠지.” 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 못할 사정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앞서 말한 선악과 사건이나 천사들의 반역 사건, 그리고 하나님이 수행하는 전쟁의 사건들이나 계시록의 심판들을 보면 하나님의 속성 중 선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이 충돌이 됩니다. “그렇게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이 왜 인간과 천사들의 악함을 방조하셨을까?”

물론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천사들을 만들 때 그들을 로봇처럼 만들지 않고,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도 좀 불충분한 게, “아- 하나님이 좀 더 실력이 있다면, 진짜 전지전능하시다면 인간과 천사의 자유의지가 악한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미리 설계를 해놨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하고 물어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대답을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여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도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의문에 대하여 시원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좀 답답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때 즉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하나님의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래서 답답함을 느낄 때, 이것을 푸는 방법이(열쇠가) 있습니다. 뭐지요? “아-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직접 하나님께 물어보자.”는 겁니다. 즉 내가 지금은 육신을 입고 있고, IQ도 200이 안되는데, 그런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무궁무진한 지혜와 지식을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나도 하나님처럼 변화가 되어 하늘나라에 가서 직접 물어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도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여러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실족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큰 갭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겁니다. 창조의 사건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저 우주와 만물들을 우리는 만들 수 없습니다. 수만 년의 시간을 줘도 우리는 못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단 6일 만에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6일 만에 만드신 것을 마음만 먹으면 단 1초만에라도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6일을 6억년이니, 6천억 년이니... 하는 성경에도 없는 이론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못 믿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능력의 갭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휴거의 사건도 그렇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다 일어난다니, 살아있는 사람도 변화가 되어서 공중으로 올라간다니... 겉으로는 ‘믿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도저히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는 모습은 있지만 실지는 못 믿는 겁니다.

인간 사이에도 보면 하수와 고수의 갭이 있어서 고수가 하는 것을 하수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수가 하수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하수는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수는 하수대로 답답하고, 하수를 상대하는 고수도 고수대로 답답합니다. 하물며 초고수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수인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이 충돌하는 것도 그래요. 그렇게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수인 인간의 생각이고, 실지 초고수인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전혀 충돌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는 답답하고, 또 그것을 하수인 우리에게 지금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도 답답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아직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 때에는 너희가 알리라.”(요16:12-13)

즉 지금은 너희들의 지식의 한계가 그것 밖에 안 돼서 내가 설명조차 해줄 수 없다. 나도 답답하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 지식의 갭을 메워줄 것이다. 그 때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답답함이 풀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때는 하나님이 즉시즉시 응답해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기분이 좋고 시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아무리 가르쳐 달라고 해도 가르쳐주시지도 않을 때가 있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무리 요청을 해도 그 대답을 못하시는 하나님의 말 못할 사정이 있겠지.“ 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그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49-50)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명이 있습니다. 최후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그 구원을 완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 깨우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남녀 간에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또한 남녀의 생각과 사고방식도 서로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말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이 살다 보면 서로 이런 말, 저런 말,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말 못할 사정이 생깁니다.

“아- 말을 해 봐. 답답해!” 하는데 좀처럼 말을 안 합니다. 그리고 난 후 뜬금없이 “우리 헤어져. 우리 이혼해.” 그러기도 하고, 말없이 집을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 말 못할 사정이 돈 문제 일수도 있고, 과거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일의 문제나 사람과의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살다보면 친한 친구나 가족과 배우자에게도 말 못할 사정이 생긴다는 겁니다. “There is reason for not telling me."

이렇게 상대방이 나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을 때, 내가 답답할지라도 ”아- 그럴 수 있지.“ 하고 그것을 이해해주고, 그 사람에 대해서 계속 선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욥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내 남종이나 여종의 사정을 멸시하고 짓밟지 아니했다. 고로 하나님이 나의 현재의 고통, 현재의 말 못할 사정을 멸시하지 아니할 것이라.“(욥31:13-14)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친구입니다. 친한 친구는 서로 비밀을 터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5)

그러나 때로는 친한 친구 간에도 말 못할 사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친구 되신 예수님께는 나의 모든 사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그 사정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우리들에게 그 사정을 다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들이 깨닫는 것이 아직 둔하고, 인격도 아직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아- 하나님이 나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으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의 생길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고,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 못할 사정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즉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하나님의 말 못할 사정까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들의 비밀과 사정을 아뢸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고 그 사정을 신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당하는 자의 사정을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시는 것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렘20:12) 즉 하나님께 자기의 말 못할 사정을 아뢰면 하나님이 듣고 역사해주신다는 겁니다. 결론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여러분의 그 사정을 들으시고 보다 세밀하게 여러분을 보살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