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날짜: 
2023/02/18
말씀: 
잠1:7
말씀구절: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설교: 

성경에 보면 ‘경외하라’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경외하라’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영어로는 ‘fear(두려워하다) God’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러나 영어만 가지고는 설명이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한자어도 찾아보았습니다. 한자어로는 ‘공경할 경, 두려워할 외’입니다. 즉 공포심이 아닌 존경하는 마음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인 히브리어로는 ‘야레’라고 하고, 신약성경인 헬라어로는 ‘포베오’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두려워하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 싶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존경심과 그 대상과 동행하기 원하는 긍정적인 감정입니다.

구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의 자세이다.” 여러분, 성경에서 ‘경외하라’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 곳은 시편(42건)과 잠언(19건)입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인 잠언1:7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 구절은 잠언 31장 전체를 요약하는 구절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기도 하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스토리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 목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성경은 왜 그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오늘 이에 대해서 같이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아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니? 이거 너무 과장된 말이 아닙니까?

이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얼마나 광대하고 또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는데 그렇게 종교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니 그건 너무 편협한 주장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이건 절대 과장도 아니고, 편협한 주장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이 세상이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세상 학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메바에서 진화가 되어 뭐가 되고, 뭐가 되고... 원숭이가 진화가 되어 사람이 되고, 어쩌고저쩌고...” 아 참!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아메바나 원숭이 같은 뇌를 가지고 아직도 그런 엉뚱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은 좀 성경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성경 창세기 1:1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 이 한 구절을 믿고 받아들이면 모든 학문의 근본이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싹- 무시합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의 모든 학문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요즘 학문의 종류를 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눕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형식과학, 응용과학’입니다. 이중에서 특히 자연과학에 속해져 있는 물리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같은 학문을 연구하는 분들과 응용과학에 속해 있는 의학을 공부하는 분들은 공부하면 할수록, 연구하면 할수록 누군가 세상을 이렇게 완벽하게 만든 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지식의 근본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종말에 될 일들과 수천 년, 수 만년 후에 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국 스스로 유식하고 똑똑하다고 하지만 지식의 근본을 모르는 천하에 무식쟁이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하수와 고수의 차이는 누가 몇 수 앞을 내다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과의 차이는 상당히 클 수밖에 없습니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왜 X-RAY 촬영을 하고, CT 촬영을 하고, MRI 촬영을 합니까? 그거 보지 못하고 수술하면 정확하게 수술이 안 됩니다.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먼저 정확이 봐야만 정확히 진단할 수 있고, 수술 성공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성경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 세상 속에서 나와 너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14:26)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세상 말로 빽이 있다는 겁니다.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겁니다.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겁니다. 내 힘으로 안 되면 하나님이 나타나서 해결해준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사람이 자기의 노력과 실력만 가지고 안 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듭니다.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 친히 그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겁니다. 특히 그 자녀들이 어려움과 곤란과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부모에게 있어서 내 자녀, 내 새끼가 얼마나 귀합니까?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는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힘듭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친히 피난처가 되어 보호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 자녀도 살고, 부모인 나도 살게 됩니다. 부모가 되시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자녀가 이 외국 땅에서 안전하게 거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겁니다.

또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병에 걸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치료의 광선이 임한다는 겁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광선 치료’ 분야가 있습니다. 특히 우울증과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매일 정기적으로 태양빛을 쬐라고 합니다. 일광욕을 하라고 합니다.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태양 빛을 받지 못하면 시들해지고 병들고 맙니다. 물론 광선 중에도 방사선,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 같은 해로운 광선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이런 나쁜 광선들이 우리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지구 자기장이나 오존층 같은 보호막을 통해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광선 중 특히 적외선은 인간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육광선입니다. 이 광선이 있어야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효소와 호르몬이 생산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의로운 해가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치료의 광선이 나와서 병든 자를 치료한다는 겁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너무나도 고치기 힘든 중환자들을 예수님은 수술도 하지 않고 그냥 뚝딱 너무나도 쉽게 고치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게 의학적으로 가능합니까? 말라기4:2 말씀처럼 치료의 광선이 임하면 가능합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적외선도 우리의 병든 몸을 치료하는데 하물며 태양을 만드시고 치료자가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치료의 광선이 나오는데 무슨 병인들 못 고치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음이 없고, 그 분을 경외함이 없어서 아닌가 체크해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이 외국 땅에서 우리들을 아주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나를 비롯해 가족들이 아프고 병들 때입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두 가지 크고 작은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힘듭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의 치료를 기대하십시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들이여, 치료의 광선이 임하여 나를, 너를 치료할 것을 믿으십시오.

성경은 오늘날에도 믿는 자에게 치료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너와 내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치료가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기뻐 뛰듯이 건강을 되찾고 마음껏 뛰고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중 오늘 하나만 더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시편103:13 말씀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느니라.”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특히 그 분은 내 아버지로 자기의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는 분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자녀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살면서 누구를 불쌍히 여겨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국제 자선 단체 중에 ‘Compassion'이란 이름의 기독교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1952년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이 한국 전쟁 때에 불쌍한 고아들을 돌보는 데서 시작이 되어 지금은 세계적으로 가난한 어린이나 전쟁고아 같은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여기에 동참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때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이영표 아저씨도 있고, 코미디언 이성미, 송은이 씨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도울까요? 다름 아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compassion 때문입니다. 시편103:13에 나오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긴다는 영어표현도 바로 compassion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홈리스(거지)를 보면 돈도 주게 됩니다. 다름 아닌 내 안에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편103:13에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부모가 되신 분들은 이 표현의 의미를 잘 아실 겁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남이 다른 사람의 자식을 냉정한 시각으로 보면 그 아이가 불쌍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떤 때는 “아- 고것 참 맹랑하고 못됐다.“고 봅니다.

그러나 부모가 보면 그 못되고 못난 자식도 불쌍하게 보입니다. 왜요? 그거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사로서 성도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쌍히 여깁니다. 왜요? 다름 아닌 내 자식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마 성도님들끼리는 “아- 저 사람은 같은 교인이지만 참 못됐다.”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그거 왜 그럽니까? 부모가 자기 자녀를 보는 시각과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종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애야, 너 밥 먹었니?” 자녀의 입장에서는 “아- 왜 만날 엄마 아빠는 자꾸 나 밥 먹었느냐고 물어요? 나 알아서 밥 잘 먹고 다닌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고요.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밥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진짜 밥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물어보는 것도 있지만, 그 말 안에 감추어진 뜻과 감정은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어디서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니냐?”라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는데,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 나아올 때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막8:2) 오늘 이 자리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이 외국 땅에서 살기 위해 꿈틀꿈틀, 바동바동 대는 여러분들을 불쌍히 보시고 있습니다.

더구나 험한 세상 살기도 힘든데 하나님을 보다 잘 믿어보겠다고 이 외국 땅에서 애쓰는 여러분들을 불쌍히 보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은 뭔가 좋은 것을 주어서 여러분들을 위로하고 싶어 합니다. 고로 하나님 아버지께 사실대로 아뢰고 부탁해보십시오.

“아버지, 저를 치료해주세요. 아버지, 저 돈 좀 더 주세요. 아버지, 제 문제 아시지요? 그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저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아버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내가 너희에게 아들도 주었는데 무엇을 주지 않겠느냐?”고 도리어 반문하고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보루가 있습니다.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치료의 광선으로 그 자녀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에 모든 식구들이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