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알고 싶어요.

날짜: 
2016/02/06
말씀: 
창1:1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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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즘 제가 주일날에는 가급적 아주 쉬운 설교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보통 새벽 예배나 수요 예배, 금요 예배는 믿음이 있는 분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주일날에는 새로 전도된 분들이나 새신자들이 오기 때문에 그들에게 메시지의 수준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도 새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고 쉬운 설교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님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나 전도사가 되어서 유치부나 초등부 어린이 설교를 아주 재미있고 애들이 집중하는 설교를 할 수 있다면 그 분은 대단히 설교를 잘하는 분이다.” 사실 어른이 애들 설교를 재미있게 그들 수준에 맞추어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설교가일수록 설교를 쉽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신학교 시절에는 자기도 잘 모르는 어려운 설교를 어렵게 해야 유능한 설교가 인줄 착각을 합니다. 오늘 저는 제 메시지의 내용과 수준을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을 위해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의 제목도 이렇게 잡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요.” 사실 제가 이 설교의 제목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은 지난 주일이었습니다.
청년부 교역자에게 매주일 출석 상황을 보고받는데 그 보고서에 새로온 청년이 왔는데 그 분이 이렇게 말하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이것을 본 순간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쳐주어야지!”
만약 여러분이 목사님이라면 이 새신자 분에게 어떻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주겠습니까? “아- 목사님!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생각 좀 해봐야겠네요.” 그러면 지금 각자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신 분은 이 앞에 나와서 한번 발표를 해보십시오. 그리고 생각하는 막간을 이용해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어느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 남자에게 소원을 하나 말해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남자는 무엇을 구할까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자신의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전 꼭 하와이에 가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를 못 탑니다. 그리고 배를 타려고 했는데 뱃멀미가 너무 심하게 나서 도저히 못 타겠더라고요. 그러니 하나님 여기서 하와이까지 다리 하나만 놓아주세요.”
이 소원을 들은 하나님은 그 남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아니 생각을 해봐라. 그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를. 여기서 하와이까지 다리를 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콘크리트와 철근이 들것이며, 또 그 기둥들은 과연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하는 것이냐? 그러니 도저히 그것은 들어줄 수 없으니 다른 소원을 말해보아라.”
그러자 그 남자는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다시 다음과 같은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여자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자의 마음에 흡족하게 만족을 시켜줄 수 있는지, 여자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을 때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여자가 No라고 말을 할 때 정말 No라고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남자가 이렇게 소원을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한참을 깊이 생각하시며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다리는 2차선이 낫겠냐? 4차선이 낫겠냐? 아무래도 교통이 원활하게 잘 되려면 4차선으로 다리를 놓는 것이 더 낫겠지?”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도 여자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 차라리 캘리포니아에서 하와이까지 다리를 놓는 것이 더 쉽다는 것입니다. 즉 그만큼 여자의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들의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하여, 저와 여러분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시고 있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이 정리되신 분들이 있으면 한번 나와서 발표를 해보십시오. 시간 관계상 제가 대표로 발표를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성경 맨 처음 장 처음 구절인 본문의 창세기 1:1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어디서 왔는지, 하나님이 언제 생겼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이...” 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책 중에 “하나님을 알고 싶어요.” 하는 제목의 책 속에 보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하늘을 향해 손을 쭉 뻗어 보거나, 눈을 감고 우주를 상상해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은 발밑에 있는 아주 작은 풀잎부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돌보고 계시지요. 하나님은 벼룩과 코끼리가 각각 무엇을 잘 먹는지 아시며, 모든 만물을 보살피시는 분이에요.”
즉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이성과 판단으로 이 세상의 만물을 살펴보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자연 계시’ ‘또는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저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 수많은 별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가, 지구와 달이 정확히 운행을 합니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세부 구조와 DNA를 보십시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건 그냥 우연히 된 것이야? 빅뱅 즉 무언가 큰 물질이 꽝- 하고 터지면서 지들끼리 알아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라고 말하는 분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화산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철은 철대로, 유리는 유리대로 각자 모양을 갖추고 진화되고 조립이 되어서 시계가 나왔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인간의 몸보다 덜 복잡한 시계를 하나 만들기 위해서도 기술자가 정확히 설계를 하고 조립을 해야 되는데 하물며 그 복잡한 동식물들의 구조와 DNA, 그리고 우주가 그냥 우연히 빅뱅하여 생겨나고 그것들이 정확하게 알아서 운영이 된다니.... 참으로 인간은 똑똑한 것 같지만 한편 아주 바보스럽기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가 되고 운영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이 그렇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운영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란 존재는 아주 완벽하고, 세밀하고, 실수가 없으신 정확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타락을 하여 제대로 알 수가 없게 되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고로 성경을 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또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누가 만드셨나요?”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4)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누가 만들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매우 의심이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왜 걸핏하면 사람을 벌주고 죽이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와 반대로 인자하고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시고... 이거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뭡니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과연 같은 하나님입니까?
이전에 ‘땅 끝에서 오다.’ ‘땅 끝으로 가다’라는 소설을 쓰신 김성일 장로님이란 분의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젊었을 때 소설 작가로서의 자질을 키우기 위하여, 또 서양 문명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그리고 나름대로 신앙의 발전을 위하여 구약 성경을 읽다가 그만 있는 신앙도 잃고 말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구약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을 여인이나 아이들, 심지어 짐승까지 다 죽이라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았습니다. “아- 이거 나쁜 하나님이구나! 너무 잔인한 하나님이구나! 죄 없는 애들까지 죽이라고 하는 이런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되겠다.” 하고 그때부터 교회도 안 다니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대조적이 것이 있습니다. 즉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정의의 하나님이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그 죄의 대가를 받게 됩니다. 그에 따른 형벌이 따르고 죽음이 따릅니다. 고로 구약 성경을 보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요즘 한국에서 나오는 신생어 가운데 ‘헬 조선’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지옥 조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가끔 어느 모임의 사회자가 여러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때에 우리나라가 ‘헬 조선’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이 중에 상당수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여자를 잔인하게 성폭행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는데, 그런 범죄자에 대한 형량이 너무나 작습니다. 인권이 있다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런 사람들은 징역 천 년, 만 년까지 때리는데 한국은 왜 이런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겁니까?“
다시 말해 죄에 따른 형벌, 즉 정의가 제대로 실천이 되지 못할 때 ‘헬 조선’이라고 느끼며, 이런 나라에서 떠나 이민을 가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헬(Hell : 지옥)'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지옥을 만들었느냐는 겁니다.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두 가지 하나님의 대조적인 성품, 즉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잘 구별하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아가야 합니다. 고로 같은 하나님일지라도 정의의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면 ‘죽여라.’고 말씀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면 ‘살려라.’고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 즉, 공의의 하나님의 성품으로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즉 ’살려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고로 하나님의 정의가 많이 나타나는 구약 성경에는 ’죽여라.‘가 많이 나오고, 하나님의 사랑이 많이 나타나는 신약 성경에는 ’살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 내가 죄인이 되어 죽음에 처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죄의 대가를 받아 죽어 마땅하지만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처자가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내 죄 때문에 크게 피해를 보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살려 주고, 그냥 사랑을 베풀면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됩니다. 고로 하나님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고 사랑도 이루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도 이루고, 이로 말미암아 나는 내 죗값을 치뤘으니 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이 의인이 되고,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겁니다. 이 스토리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스토리입니다. 고로 교회에 나와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사망이 물러가고 영생이 주어집니다. 저주가 물러가고 축복이 주어집니다. 불안이 물러가고 평안이 주어집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3:13-14)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정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나 오늘 도둑질하려고 하는데 제발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계속 도둑질 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 이제는 도둑질 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나 저 사람 싫습니다. 저 사람 미워 죽겠습니다. 하나님이 내 대신 한 대 때려 주세요. 죽여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도리어 원수 같은 사람도 ”주여! 저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실천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은 성경 속에만 있는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날도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살피시고, 내 곁에서, 내 안에서 나를 도와주시고 있는 분이십니다. 즉 구약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많이 역사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역사하셨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내 곁에 오셔서 나와 같이 살고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며칠 전 이런 우스운 퀴즈 하나를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알아맞히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살면서 나와 가장 많이 끝까지 동행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정답은 배우자도 아니었습니다. 자녀도 아니었습니다. 부모님도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모기였습니다. 모기는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피곤하고 지칠 때에도 늘 끝까지 동행하시는 그 분이었습니다. 요즘은 남미를 중심으로 ‘지카 바이러스’를 한창 옮기시고 다니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기는 추운 겨울철에는 어디론지 사라집니다. 겨울에는 나와 동행하기를 싫어합니다. 아니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도 늙어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 나와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님은 추우나 더우나 나와 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 그 분이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내 곁에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말로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앙꼬 없는 찐빵이요, 김빠진 맥주요, 불거진 화로요, 전기 나간 항구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예수님 안 믿고 그 동안 어떻게 살았니? 애야, 너 혼자 사느라고 참 고생이 많았구나!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제 그만 나에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였노라. 내가 너와 동행하여 너를 대신하여 네 인생을 살아주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