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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을 보면 성경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세상에 그 어떤 책들도 세상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기술한 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4절) 그리고 둘째 날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10절) 그리고 그곳에 각종 나무들과 채소들을 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12절)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18절)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21절)
여섯째 날에는 땅의 짐승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25절) 그리고 짐승들과 함께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
여기서 특이한 점은 ‘좋았더라.’라는 말이 총 7번 나옵니다. 둘째 날에는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습니다. 반면 셋째 날과 여섯째 날에는 ‘좋았더라.‘라는 말이 각각 두 번 씩 있습니다. 특히 여섯째 날 사람을 지으시고 난 후에는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로 창조물에 대한 총평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저희 집 차고 문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녹이 슬고 페인트가 벗겨져 페인팅과 함께 수리를 좀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집에 들어오고 나가면서 차고를 쳐다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감탄합니다. “아- 누가했는지 참 보기에 좋았더라.” 그런데 마음 한 쪽 구석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집은 보기에 좋은데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어떤가?“ 그러면서 ”아- 교회에도 페인트를 칠해야 할 곳이 있던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일단 생각이 들면 그것을 가능한 한 신속히 해야 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교회 층계 모서리에 하얀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며 나가고 하다가 자칫 층계 구분이 잘 되지 않아 발을 헛디딜까봐 칠하는 페인트입니다. 페인트를 칠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성도님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또 그것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보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며칠 전부터 들었던 생각입니다. 드디어 교회 모기지를 다 갚았습니다. 저의 집 모기지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일단 교회 모기지를 먼저 갚았으니 그것도 “보기에 좋았더라.”입니다. 만약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내 집을 먼저 짓고, 교회 건물이 없거나 혹은 교회 모기지는 아직 갚지도 안았는데 내 집 모기지만 먼저 갚았다면 제 양심상 그것은 보기에 별로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니 다윗왕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는 호화로운 궁궐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그냥 야외 텐트에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이 기특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 세밀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나의 전을 지으려는 것은 좋지만 너는 군인이라 그 동안 너는 전쟁터에서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러니 네가 성전을 짓지 말고 평화의 사람인 네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하라. 그리고 너는 그가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모든 물자를 준비하라.”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내 집보다 하나님의 집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도 보기가 좋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좋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0년 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고 살기 바빴습니다. 이때 학개서에 보면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학1:4-11)
즉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나의 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암송하고 있는 유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6:33. 같이 암송해봅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한국 분들이 이곳 캐나다 땅에 이민이나 유학을 와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한국에서는 학력도 좋고 경력도 좋지만 이곳 캐나다 땅에서는 그것이 잘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소수 민족으로 살면서 인종차별도 겪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백인 캐나다 사람들보다는 경쟁력이 딸립니다. 이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저를 비롯해서 이곳 캐나다 땅에 오신 우리 한국 분들은 대부분 성실하고 근면합니다. 게으르고 나태한 것보다 성실하고 근면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또 사람 보기에도 좋습니다.
크리스천이 이런 성실 근면한 성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은 이곳 캐나다 땅에서도 우리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고로 이곳에서의 우리의 경쟁력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남들보다 더욱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예배에 오는 것도 늦게 오지 말고 남들보다 먼저 와서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제멋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멋,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적당히 술도 마시고, 세상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왠지 어색합니다. 몸에 맞지 않는 답답한 옷을 걸친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즉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는지를 자기가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합니다.
신앙도 인본주의 신앙이 있고 신본주의 신앙이 있습니다. 인본주의 신앙은 자기 좋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반면 신본주의 신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어떻게 보실까요? ‘심히 좋았더라.‘입니까? 아니면 ’심히 나빴더라.‘입니까? 이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즉 옛날에는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더러워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더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가 결단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여, 또 다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칭찬하시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집을 나서기 전에 각자 거울을 보고 나왔을 겁니다. 그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아, 이거 요즘 내가 왜 이러나? 왜 이렇게 살이 많이 쪗지!” 아니, 그런 것 말고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나빴더라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의 마음의 중심이 어떤지, 삶의 모습이 어떤지 한번 평가해 보십시오.
창세기에 둘째 날에는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시고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고 난 후 유독 좋았더라고 말씀하지 않은 이유는 그곳 하늘에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속을 들여다보실 때 나의 마음속에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기, 질투, 원망, 미움, 다툼, 허영, 방탕, 교만과 같은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좋았더라고 말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은 순종과 겸손과 사랑과 주님을 위한 열심이 있다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 캐나다 땅에서의 나의 삶의 생활과 모습을 하나님이 들여다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심히 좋았더라입니까? 나빴더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깨달음이나 양심이 이 대답에 어떻게 답변하고 있습니까? 아무쪼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성경 구절이 저와 여러분에게 응하는 구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