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본심

날짜: 
2006/07/16
설교: 

애3:33 하나님의 본심
사춘기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지지리 속을 썩이자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호되게 야단을 치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 같은 녀석은 우리 집안에 필요 없어. 당장 나가 죽어!” 그러자 이 사춘기 아들은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고, 여자 친구하고도 막 절교 상태를 당하여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 같은 것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야!”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도 자기를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고 당장 나가 죽으라고 하기에 진짜 아버지가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줄 알고 나가서 자살해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가끔 듣게 됩니다.
이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아들의 시체를 붙잡고 이렇게 통곡을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이 녀석아, 왜 그리 애비의 마음을 몰라 주냐? 이 녀석아, 나가 죽으라고 진짜 죽는 녀석이 어디 있냐? 아이고 이 천하에 불효자식아!” 여러분,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가끔 이런 비슷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부모의 본심을 자녀가 몰라주고, 반대로 자녀의 본심을 부모가 몰라주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본심을 몰라주는 경우는 비단 부모와 자녀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연인 간에도 서로의 본심을 몰라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서로의 본심을 모르므로 눈물의 이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 한국의 갑돌이와 갑순이도 그랬습니다.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서로의 본심을 숨기므로 마음에도 없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서 한없이 울었더래요.”
그리고 스승과 제자 간에도 서로의 본심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 잘되라고 심하게 꾸중을 하면 “어휴, 저 꼰데 왜 저러나?” 하고 스승을 욕하며, 더 심하면 치맛바람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기 엄마나 세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기 아빠에게 그 스승을 고발하므로 아예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서로의 본심을 모르면 오해를 낳고, 오해는 서로 간의 신뢰를 깨트리고, 그러다 보면 같이 살아야 할 사람, 같이 협력해야 할 사람이 서로 분리되고 나누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우리의 본심과 중심을 너무도 잘 아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똑똑해도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인간의 좁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다보니 대충 하나님의 마음은 짐작은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불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고 좋은 일이 생기면 괜찮은데 하나님을 믿고 난 후부터, 혹은 하나님을 보다 잘 믿으려고 작정하고 실행한 날부터 크고 작은 사건과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질 때, 그만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예레미야 애가 3:19에 '쑥과 담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당시 쓰디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소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린 이후에 그들은 고난의 현장에서 연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애통의 노래를 부른 것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벽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똑똑한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혀간 황폐한 모습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초와 재난의 현장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자꾸 하나님의 본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그리고 예레미야 29:11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여러분,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다가온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나님은 나를 잊으셨는가 보다.” 이런 식으로 위험한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당신에게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본심은 여러분을 고생시키고 위험과 재앙에 빠트려 죽이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고요? 혹시 이런 예화를 들으면 어떻습니까? 아프리카 어느 곳에는 강물이 얼마나 거센지 모릅니다. 그 강을 건너는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바윗돌을 하나씩 짊어지고 건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무거우면 물에 잘 떠내려가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누군가 바윗돌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힘들고 귀찮다고 그냥 강을 건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거운 고난의 바윗돌을 짊어지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누구나 힘이 듭니다. 빨리 그 무거운 것을 벗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무거운 것을 지지 않으면 물에 떠내려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을 살리려고 때로는 무거운 문제를 지고 가라, 무거워 보이는 저 사람도 지고 가라고 할 때가 있는 것이지, 단지 우리를 괴롭히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본심을 바로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중을 내 마음에 담아두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한 농부가 아들을 너무 심하게 농사일을 시키는 것을 보고 이웃 농부가 이렇게 핀잔의 말을 했습니다. “이보게, 아니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아들을 그렇게 심하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소?”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농작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키우고 있소."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키우는데 있어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도 한 차원 더 높습니다. 고로 지금 당장 당신의 생각에 좀 이해되지 않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오해는 자유입니다만 하나님의 본심마저 오해하면 인생은 나중에 기댈 때가 없어집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오늘 이 자리에 부르신 것은 우리를 피곤케 하고, 우리의 시간과 돈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참다운 축복과 평안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스런 눈길을 보내기도 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하고 무거운 탄식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과 불평을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고로 성경은 자주자주 하나님의 본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본심을 오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루는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서로 부부관계를 맺고 살다가 서로 상처를 받고 싫증을 느끼어 하도 이혼을 하려고 하니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구약 성경 신명기 24:1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어주고 그를 자기 집으로 내어보낼 것이요.”
이 구절만을 생각하면 “아하, 하나님은 우리가 합법적으로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구나!”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실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혼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혼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인간이 하도 이혼을 하여 사회 문제가 발생하니 하나님이 사회 문제를 해결해 주느라고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아내 된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주지 않고 내어버리는 것은 그 여자를 노예나 창녀로 전락시키는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자의 인권을 보호해주려고 이혼장을 써서 정식으로 이혼을 하라고 한 것이요, 사사로이 그냥 여자를 내어버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즉 부부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심은 이혼이 아니요 서로 용서하며 관용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면 이단이 되고, 사이비가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칫 마귀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본심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요,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면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본심대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희망이 이루어
집니다. 마침내 행복이 이루어집니다. 아니 지금의 힘든 과정도 행복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을 깨닫고 고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자고로 신앙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본심을 잘 이해했습니다. 고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위에 앉기까지 그에게는 수많은 큰 위험과 고난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또한 요셉도 하나님의 본심을 잘 알았습니다. 고로 그가 배 다른 형제에게 미움을 받아 인신매매를 당하여 노예로 팔렸을 때에도,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사도 바울 또한 하나님의 본심을 잘 알았습니다. 고로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수없이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리고 결국 목이 잘려서 순교를 당하고 말았지만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고생시키신 것은 하늘의 큰 상급을 주기 위함이지 단순한 재앙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이곳에 보내신 것은 당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살리시려는 것이요, 당신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에게 더욱 큰 축복과 상급을 주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재앙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본심을 붙잡고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