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중성

날짜: 
2006/06/18
설교: 

신6:10-13 하나님의 이중성
여러분, 하나님은 이중적인 사람,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그리고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반대의 구절도 있어 우리들을 헷갈리게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잠4:27, 수23:6)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불평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아니 똑같은 하나님이 언제는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하시다가, 또 언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시고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야?“
물론 이런 이중적인 구절들은 문맥의 전후를 잘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이중적인 구절로 인하여 신앙이 헷갈리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이중적인 하나님으로 오해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앞서 말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구절은 이런 저런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고,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구절은 신앙의 결단을 바르게 하라는 것이지 서로 다른 이중적인 의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가 다른 이중적이고 비합리적인 구절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에덴동산을 만드셨는데 왜 그곳에 사단을 두고 또 선악과를 두어서 병 주고 약 주느냐? 축복을 주려면 온전히 주시지? 왜 그런 야비한 수단을 쓰느냐?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지 않느냐?“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신 것과 에덴동산에 사단을 두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고 여러 각도로 설명을 하고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이중적인 사건이나 구절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신앙생활에 혼돈을 초래할 소지가 있습니다.
기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언제는 “너는 소리 높여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기도 하고, 언제는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라”고 하시며, 또 언제는 “한 시간 동안 깨어서 기도할 수 없더냐?”고 하시기도 하고, 언제는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아시느니라”라 하시기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서로 다른 이중적인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 간에 서로 토론과 격론이 생기고 의견이 갈라지고 때로는 다툼이 생기기도 합니다.
저의 집안의 경우 저의 아버님은 기도를 많이 안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니 저희 아버님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아시느니라”라는 구절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님은 시끄럽게 기도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저희 아버님은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저희 아버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보면 아주 엄숙하게, 아주 조용하게, 아주 거룩하게, 그러나 1분이 넘어가지 않고 “아멘!” 하고 일어나십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어머님은 늘 산기도도 다니고 기도원도 다니고 철야예배도 다니며 부르짖어 기도를 잘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빨리 오고 마음의 답답함과 스트레스도 풀어지는 것을 수없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일이 꼬이고, 문제가 터지고, 재미없는 일이 생기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기 때문에 기도를 아주 오래합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다가 나중에는 다리가 저려서 양반자세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리를 쭉 펴고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기도를 하다가도 나중에는 상체를 흔들고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저희 아버님이 보면 뭐라고 한 마디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자세가 그게 뭐야? 그리고 큰 어른이신 하나님께 그렇게 악을 쓰고 인상을 짓고 기도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면 저희 어머님은 “당신은 모르면 가만있어요.” 하고 계속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저희 아버님은 “쯧쯧쯧 하나님이 귀가 먹었나!” 하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그러면 저희 어머님은 “아이고, 하나님 아시지요. 보시지요. 우리 영감 기도의 영을 받게 해 주세요.” 하고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계속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기도에 대한 이중성으로 인하여 가족식구들 간에 서로의 의견이 갈라질 때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저희 가정의 경우에는 가정 예배가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아주 짧게 거룩하게 드리는 예배요, 한 번은 아주 길게 조금 시끄럽게 드리는 예배입니다. 짐작이 가시겠지만 저희 아버님과 같이 예배를 드리면 찬송도 딱 한 곡을 하고, 기도도 3분을 절대로 넘기지 않고 바로 예배를 끝냅니다. 그러나 저와 저의 어머님이 같이 예배를 드리면 찬송도 30분 정도 하기도 하고, 기도는 때로는 두 시간을 하기도 하고 예배를 아주 오래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에 대한 이중적인 말씀으로 인해 가족간에 서로 토론이 벌어지고 다툼이 나다가도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이중성에 대한 문제가 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은 저의 아버님에게 아주 다급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저희 아버님이 저와 저의 어머님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십니다. “야 이런 큰 문제가 생겼으니 철야예배 가서 열심히 기도 좀 해라.”
그러면 저의 어머님은 속으로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아실 텐데! 그리고 철야예배는 무슨?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잠만 자다 나오면 되지?” 물론 이렇게 말씀하시는 저의 어머님도 때로는 혼자 아주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부르짖어 기도할 줄도 알고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할 줄도 알면 기도의 이중성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부르짖어 기도만 하고 묵상으로 기도할 줄 모르면, 그리고 반대로 묵상으로 기도만 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줄 모르면 때로는 서로 간에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더구나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아시느니라”라는 구절만 은혜를 받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구절은 은혜를 받지 못하여 아예 기도를 포기하고 사는 사람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이중성이 스스로 함정이 되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해놓고 본문에는 불로소득을 얻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불로소득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성읍,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우물입니다. 이런 것을 노동도 하지 않고 얻는다니 이것은 불로소득이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씀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까?
옛날이나 요즘도 이런 문제로 인하여 열 받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니 나는 열심히 아침부터 밤중까지 이렇게 죽어라고 일하는데 소득이 이렇게 적고, 저 사람은 맨날 놀면서 어쩌다가 딱 한 시간만 일했는데 왜 저렇게 소득이 많은 거야? 이런 놈의 세상 불공평해서 어디 살겠나?” 특히 한 시간에 300불을 받는 변호사와 한 시간에 8불을 받는 사람과 수입만을 놓고 비교하면 분명히 불공평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요한 자와 가난한 자가 나누어지다 보니 부르조아 자본자 계급이 생기고 프로레타리아 노동자 계급이 생기고, 더 나아가 “에이 이런 불공평한 세상 뒤집어 업자!” 하고 생긴 것이 공산주의가 아닙니까? 물론 이런 것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하 저 변호사는 정신적인 노동을 한 것이고, 이 사람은 단순한 육체적인 노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것을 사회가 더 알아주고 대접을 하는구나! 그리고 젊어서 남들 하기 싫은 공부를 열심히 한 대가를 저 변호사가 이제 찾아 먹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요, 자신의 수입이 적어도 별 시험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상당한 시험이 됩니다. 더 나아가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괜히 잘 사는 사람을 질투하게 되고, 올바른 크리스천으로서 제대로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더구나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떤 젊은 사람이 있는데 부모가 돈이 많아 그 젊은이는 별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아주 잘 사는 경우입니다.
이때 “아하 성경에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19:14)고 했는데 저 젊은이는 조상에게서 집과 재물을 상속으로 받았구나!“라고 이해하면 좋은데, ”아니 저 젊은이는 일하지도 않고 불로소득을 했구나! 아이고 배 아파라!“라고 생각하면 스스로 불행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면 못 가진 자는 늘 가진 자를 삐딱하게 쳐다봐야 되고 그렇게 되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 즉 하나님의 일을 하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이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더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도 불로소득입니다. 그러나 실지는 불로소득이 아니고 육체적인 노동과 정신적인 노동보다 더욱 값어치 있는 영적인 노동을 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가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는 “원수를 미워하라. 원수를 진멸하라”고 했다가 신약에 와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도무지 하나님의 이중성으로 인하여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속히 오신다고 했다가 한편으로는 오래 기다리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무섭게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할지 하나님의 이중성에 자칫하다가는 신앙이 파괴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 속담에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처럼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시겠다는데 우리 인생이 감히 뭐라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문부호를 달겠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내가 섬기는 하나님, 내가 전도하는 하나님이 이중인격자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이중성에 시험이 든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고로 성경을 보면서, 혹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중성에 의문이 들 때에는 즉시 목사님에게 상담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은 이중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상황에 맞게, 가장 선하게 역사하시다 보니 때로는 하나님은 이중적인 하나님으로 혹은 나쁜 하나님, 위선적인 하나님으로 비추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이중성에 의문 부호가 생길 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그 이중성의 문제를 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 이중성은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나타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인격과 완벽하심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중성의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결코 이중성의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중성으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직한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나 신뢰할 만 하고 누구나 좋아할 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고로 하나님을 굳게 믿고 그 분을 계속 좋아하고 사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