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날짜: 
2016/01/29
말씀: 
요3:16
말씀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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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의 전도를 통해서 교회에 나왔든지 간에 아무튼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일 겁니다. 물론 교회에 나온 지 오래되신 분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 “에이, 그것은 내가 옛날 교회학교 어린아이 시절 때부터 훤히 아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할 겁니다.
맞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한 구절을 가리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씀 한 구절만 제대로 알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씀을 통하여 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보다 깊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라고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신’이라고 하는데 이 ‘신’에 대한 몇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첫째 '무신론‘(Atheism)입니다. 즉 신은 없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주장하는 분들 중에는 이런 말을 자주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 모양이냐?”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 “나는 나를 믿는다.”
둘째 ’불가지론‘(Agnosticism)이 있습니다. 즉 신이 있다 없다 말하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신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해! 도무지 파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신중해보이고 중립적이고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제일 전도하기가 힘든 부류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입장은 ‘유신론’(Theism)입니다. 즉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멘이지요? 그리고 이 유신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신론’(Deism)입니다. 다른 말로 ‘자연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18세기 계몽주의시대에 등장한 이론으로 세계를 창조한 하나의 신을 인정하되, 그 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동떨어져서 별도로 존재하며, 세상을 창조한 뒤에는 세상의 물리법칙을 바꾸거나 인간에게 접촉하는 인격적인 신으로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고로 이들은 신의 계시나, 신의 사랑이나, 신의 기적 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범신론’(Pantheism)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만유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이론입니다. 즉 땅의 나무도 신이요, 돌도 신이요, 사람도 신이요, 동물도 신이요, 하늘의 별도 신이요, 달도 신이요, 해도 신이요, 누구나 모두가 다 신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셋째 ‘다신론’(Polytheism)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많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론입니다. 대표적으로 힌두교가 있습니다. 힌두교에는 신이 3억-4억 개라는 말도 있을 정도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힌두교에는 일인당 신이 하나씩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민족종교인 ‘신토’도 다신론 사상인데 이 신토에는 800만개의 신, 혹은 3만개의 신의 있다고 합니다. 일제압제기 때 일본 사람들이 이 신토 숭배를 강요하므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순교를 당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넷째, ‘일신론‘(Monotheism)입니다. 유일한 신이 있다고 믿는 이론이기에 ’유일신론‘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는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신약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하나님, 즉 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후 600년경에 생긴 이슬람교도 ‘알라’라고 하는 유일신을 믿습니다. ‘알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신’ 또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고로 이슬람 성경인 ‘꾸란’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 ‘하나님’이라고 번역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 번역본에는 모두 ‘알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알라’라는 의미를 모르는 분이 한국어 꾸란을 보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혼동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먼저 퀴즈를 하나 낼 테니 한 번 맞춰 보십시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몇 분일까요?” 정답은... 세 분이 아니고, 한 분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유일신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유일신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세 분이 모여서 하나의 신을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하나님이 ‘세상을’ 하고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지칭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와 인류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은 악을 사랑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 나온 배경을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유대인이며,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이며, 율법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요, 유대인들만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구절은 하나님은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이 한 마디 말씀은 니고데모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개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서 특별히 제한된 몇몇 사람, 몇몇 민족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굴이 까만 사람도 사랑하셨고, 하얀 사람, 노란 사람도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피부색이 섞인 혼혈인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민족과 족속과 방언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지만, 너도 사랑하시고, 그도 사랑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불의한 마귀의 자녀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고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였느냐고요? 그 사랑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다른 성경 번역본을 보면 이 구절을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이토록, 극진히, 무척, 너무나’ 제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는 ‘엄청나게, 무지무지하게’ 애들 표현으로는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여러분! 태어나서 이제까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신 경험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사랑이 가장 크고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대부분이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분은 아내와 남편의 끈끈한 사랑, 그리고 애인의 사랑도 감미롭고 달콤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내 가족,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한정됩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하나님의 사랑만큼 크지도 높지도 깊지도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의 지식을 통하여 이성으로 알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아니 원수를 위하여 내 생명, 아니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기까지 내놓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랑에 대하여 잘 실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이성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일단 감정으로 느껴야 실감이 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더울 때 시원한 바람이 불면 우리는 느낍니다. “아- 시원하다!” 그리고 추울 때 따뜻한 햇살이 비추면 우리는 느낍니다. “아- 따듯하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을 감정으로 믿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감정이 늘 일정하지 않고 들쑥날쑥 하기 때문에 감정적인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까지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이것은 크리스천으로서 대단한 비극입니다. 마치 사랑의 감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미혼인 청춘남여에게 권면을 하고 싶습니다. 돈보고 결혼하지 마십시오. 돈에 울고 돈에 배신을 당하기 쉽습니다. 인물이요? 학벌이요? 인격이요? 신앙이요? 여러 가지 나름대로 조건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랑입니다. 제가 지금 너무 순진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우리 목사님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속으로 비웃고 있나요?
저도 시집 갈 딸이 있습니다. 저와 우리 집 사람이 하는 말은 이겁니다. “지들이 좋아야지!”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 청년들이 시집 장가 가야할 시기가 지났거나 되었는데도 아무런 낌새가 없으면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곳 예배당이 연애당이 되는 것을 허락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여, 세상 술집이나 카바레에서 연애하려고 하지 말고 이곳에서 떳떳이 연애하십시오. 단 조심할 것은 조심하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사랑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사랑이 식더라는 겁니다. 아니, 이게 원수가 되더라는 겁니다. 이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목사님! 사랑이 우선이라고 했는데 사랑이 식어서 원수같이 느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때에는 적과의 동침, 즉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원수 같은 나를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이때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할 때입니다.
즉 그 원수를 위하여 내 몸을 희생하십시오. 그 원수를 위하여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그 원수를 위하여 동거하십시오. 그 원수를 위하여 돈을 벌고, 그 원수를 위하여 잔디도 깎고, 집도 수리하십시오. 괜히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찾겠다고 허튼 수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로맨스가 아니라, 불륜이요 간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마디로 ‘원수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이제 느껴야 합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으라고 말씀합니다.(엡3:1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라고 합니다.(계3:4-5)
어떤 분은 ‘독생자’ 즉 ‘외아들‘이란 말에 잘 납득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와 결혼을 하셔서 예수님이라는 외아들을 낳았나요? 혹시 마리아라는 여자와 결혼을 하셨나요? 어- 내가 알기로는 마리아의 남편은 요셉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혹시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금의 내 어머니와 결혼하셨나요? 언제 하셨는데요? 어- 이상한데 내 이름은 예수가 아니고 김원효인데요. 그리고 내 아버지는 따로 있는데요.”
어린아이 같은 순진한 질문입니다만 이 질문에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개의 아들은 개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처럼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고, 우리처럼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우리 인간처럼 어머니가 없어도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좀 더 유식한 말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타락하여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할 인간들을 위하여 한 가지 법칙을 베푸셨는데,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히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어떤 착한 행실을 해야 구원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착한 행실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우리 모든 사람들은 절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착해질 힘과 능력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헌금을 많이 해야 구원을 주신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기독교는 부자들의 종교이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시는 중에 가장 쉬운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믿는다는 조건입니다. 이것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학벌이 좋지 않아도 되고요, 인격이 그리 잘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조건은 강도도, 창녀도, 도둑도 “주여- 내가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쉬운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구원 받는 방법이 너무나 쉬워서 의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것은 실지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태양 빛을 보십시오. 모든 동식물에게 너무도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값없이 주셨지 어떤 대가를 받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기 즉 산소도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값없이 주셨지 돈을 받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즉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것을 영어로 ‘priceless’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은 priceless입니다. 선물입니다. 선물은 돈을 받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는 것이고 그냥 받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만으로 너희에게 영생을 선물로 줄 테니 그냥 가지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귀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귀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들에게 감격이 없습니까? 왜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누리는 그 벅찬 행복을 왜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사랑하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오면서도 왜 도살장에 끌려오는 것처럼 오기 싫어합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활력이 없어지고, 믿음도 떨어지고, 의심만 잔뜩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므로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봉사할 충성심도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시험에 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직접 느끼고 회복해야 합니다. 도대체 왜 내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사랑의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아직 느끼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