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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병이 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치료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 고통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런데 열심히 그렇게 기도는 하지만 가끔 믿음이 받쳐 주지 않아서 의심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치료해 주실까? 하나님이 진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까? 하나님이 진짜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내 기도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데...”
성경에는 기도하고 나서 이렇게 의심하면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기도의 응답, 질병의 치료, 문제 해결의 열쇠는 기도하고 나서 의심하지 않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확실히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찾아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나를 치료해 주고, 왜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왜 내가 힘들 때 나를 도와주시는 것인가?
무엇 때문일까요? 내가 잘나서, 내가 의로워서, 내가 배워서, 내가 가졌기에.... 아닙니다. 단지 이유가 있다면 내가 못났기 때문에, 내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중에 가장 수가 적고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심이 우리가 남들보다 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못살 정도로 약하기에 하나님이 보살펴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높은 곳에서도 사랑하는 엄마가 부르면 엄마를 믿고 뛰어내리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므로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정성을 쏟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므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축복하시고, 치료하시고, 각종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될까요? 연인 간에 사랑이 식으면 좋은 것을 주려는 마음도 식어지고, 말도 퉁명해지고, 만나기도 싫어집니다. 그리고 사랑이 식어진 연인들에게는 자연히 믿음도 파괴되고 맙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는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절대로 그게 아닌데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아주 당연한 사실도) 안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근거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단어에 ’나‘를 집어넣으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사” 즉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사 복을 주시고, 치료하시고, 위로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했다는 그 사랑의 표현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요? 그리고 목사님이 되어서 ‘이처럼’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반드시 성도님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알려주고,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느끼게 할 수 있을까요? 참 부담되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는 반드시 목사님으로서 해야 할 설교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하도 답답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습니다. 검색 단어는 ‘이처럼 사랑하사’를 찾았습니다. 여러 글들이 나옵니다. 늘 듣던 말이라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처럼 사랑하사’의 그 사랑을 한번 느끼게 했으면 좋겠는데.... 아- 그 사랑을 어떻게 느끼게 할까요? 그 사랑은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입니다. 내가 그 정도로 하나님을 실망시키면 이제는 하나님이 “애야, 나는 너에게 실망했다. 이제 우리 관계를 끊자.”라고 해야 하는데...
어-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계속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나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래 요? 왜 계속 나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하나님, 바보예요? 이제는 저를 버려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단다, 내 사랑은 끝이 없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끝이 없는 사랑, endless love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조건이 있어야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남녀가 사랑할 때도 조건을 봅니다. 키는 어느 정도, 미모는 어느 정도, 재산은 어느 정도, 학벌은 어느 정도.... 그리고 그 조건이 안 맞으면 사랑도 사라지고 맙니다. “안녕- 바이바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을 보면 나는 완전 흑수저입니다. 나는 그 조건을 하나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태에서부터 택하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니, 그 보다 훨씬 전에, 세상을 만들기 전인 창세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운명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로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만들기 전에 운명으로(신학적으로 하면 예정으로) 정해났다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 왜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운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운명‘ 하면 도저히 바꿀 수 없도록 미리 정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도저히 변경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후퇴할 수도, 돌이킬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고요?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싫어합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를 증오하고, 원수를 저주합니다. 원수를 만나면 꼬집어주고 싶고, 한 대 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를 보면 사랑합니다. 품어줍니다.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나 같이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도 사랑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묻습니다. “엄마(아빠)를 얼마나 사랑해?” 아이가 대답합니다. “응- 하늘만큼 땅만큼”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찬송가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냐고요? 여러분,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오대양(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해 남극해)의 그 많은 양의 물을 잉크로 삼아도 다 쓸 수 없는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죽어서도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해!”라고 말을 하지만 영원하지 못한 존재가 어떻게 영원을 논할 수 있습니까? 즉 그 말은 죽기까지만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내 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몸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분입니다. 죽지 않는 분입니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은 다시 나를 무덤에서 살려내어 기필코 사랑하고야 마는 분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 사랑은 천년, 만년, 억년 계속됩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질리도록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제 저를 그만 사랑하세요. 됐다고요. 이 정도면 만족한다고요.” 아니, 안됐습니다. 나는 됐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정도 사랑 가지고는 만족을 안 합니다. 영원토록 사랑해야만 하나님은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랑(unchangeable love)입니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너무나도 끈질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를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랑에 오늘도 굶주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나를 보면 괜히 좋아서 웃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교회에 오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자가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로 기도한 후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아직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해서, 변치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병이 들면 반드시 고쳐줍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반드시 함께 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11:3) 사랑하시는 자가 병이 들었으니 예수님이 반드시 오셔서 자신의 오빠 나사로를 고쳐주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어도 그 무덤에서 외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님은 그를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한 마디로 증명합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라헬이란 여성을 연애했습니다. 그녀와 결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조건이 7년간 무보수로 노동을 하는 겁니다. 비바람을 맞으면서,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어 검게 변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양떼를 칩니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수일처럼 여겼더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수고하는 것은 수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보람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딕 호잇‘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엄마 배속에서 나올 때 그만 탯줄이 목을 감아 식물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들이 말을 할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인 ’딕 호잇’에게 복지 시설에 아들을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정성껏 돌보아 줍니다.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특수 장치를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간단한 말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그 아들이 특수 장치를 동원하여 컴퓨터에 글을 썼습니다. “나도 달리고 싶다.” 그 말을 읽은 아버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한 아들의 소원을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8km 달리기 시합에 참여했습니다. 아들이 너무너무 행복해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아들의 행복을 위해 계속 달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보스톤 마라톤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마라톤에서 그만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계속하여 남몰래 체력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라톤에 도전했습니다. 드디어 완주를 했습니다. 뒤에서 두 번째로 들어왔습니다. 아들도 지치고 아버지도 지쳤지만 군중들은 그 부자를 위해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아들은 성취감에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아버지는 숨이 가빠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한편으론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철인 3종 경기에도 참여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살 이후론 자전거를 타보지 않았던 자전거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철인 3종 경기에 참여했습니다. 아들을 고무보트에 태우고 밧줄로 자기 몸에 묶었습니다. 그리고 3.9km를 수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다시 휠체어에 태우고 182km를 자전거로 달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42.195km 마라톤 풀코스를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달렸습니다. 이른 아침에 시작한 경기가 어두운 밤중 늦은 시간에 되어서야 16시간 만에 골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도 지치고 아빠도 지쳤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행복한 모습은 아버지에게 비교할 수 없는 보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들이 여태까지 달려온 숫자는 마라톤 64회, 철인 3종 경기 6회를 비롯해 6000km 대륙 행단도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특수 장치로 된 컴퓨터로 말합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없었다면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았단다.”
여러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오늘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너와 나를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숨이 넘어가고 힘들지라도 내가 기뻐하면, 내가 행복해하면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왜 그렇게 달리냐고 묻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자녀가 행복해 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든지 자기 목숨을 또 내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한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느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느끼고 확신하며 전해줄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없는 그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의 간증 중에 아들을 위해 달리는 아버지의 실화를 영상을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66장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