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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아침입니다. 제가 새벽예배를 가려고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동네를 운전하면서 교회로 가는데 갑자기 도로에 뭐가 획- 지나갑니다. 자세히 보니 늑대 같은 짐승입니다. “아니, 저 녀석이 왜 마을에 나타난 거야? 이 새벽에! 나는 새벽예배 가려고 나왔는데 너는 이 새벽에 왜 나왔니? 날씨도 추운데... 재가 아직 월동 준비가 안됐나? 그나저나 너 요즘 뭐 먹고 사니?”
그 녀석이 뒤돌아보며 말합니다. “원 별 걱정을 다하네! 나 잘 먹고 산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아주신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너도 돌보아주시고 있구나!” 여러분! 오늘 본문도 말씀합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12:24)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사는 이 캘거리 캐나다 동네에서는 까마귀도 많고, 까치도 많고, 다람쥐를 비롯해 토끼, 사슴 여우, 곰 등 많은 동물들을 길거리에서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고 기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동물들뿐만 아니라 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분문은 말씀합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눅12:27-28)
여러분!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가 이 지구상에 몇 마리나 될까요? 제가 백화사전을 찾아보니까 참새만 5000여종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5천 마리가 아니라 종류가 5천여 종입니다. 참새만 5천여 종이니 다른 새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종이 있겠으며 그 수를 따지면 얼마나 많을까요? 또한 백합화도 이 지구상에 약 4000여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백합화만 종류가 4천여 종이니 이 세상에 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누가 먹이고 있습니까? 조류학자들이 먹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은 그것들을 하나님이 먹이고 키운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찮은 참새 한 마리, 들에 피인 백합화 한 송이도 하나님께서 그처럼 배부르게 먹이시고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저는 이번 주에 이 구절이 계속 마음에 떠오르면서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영어 성경에 보면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 이 말은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습니다. 백합화는 아무리 멋있어도 일생동안 한 색깔의 옷 밖에는 입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much more! 철을 따라서 우리는 형형색색 옷을 입습니다. 빨간 색도 입었다, 파란 색도 입었다. 양복도 있었다, 잠바도 입었다합니다. 음식도 참새는 만날 그렇고 그런 모이만 주워 먹습니다. 좁쌀, 모래, 곤충, 지렁이, 굼벵이 이런 것만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much more! 김치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탕수육도 먹고, 갈비도 먹고, 만두도 먹고, 비빔밥도 먹고....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만들어 먹는 것만은 아니진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 재료를 주셔서 먹고 입는 것입니다. 천부께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much more 더욱더 넘치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 속에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애정이,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를 비롯해 산다고 하는 것 때문에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곳 이국땅에서 지금 경기도 안 좋은데 산다고 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 염려와 근심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런 짐승들도, 식물들도 하나님이 돌보아주시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들은 마땅히 하나님이 아주 세밀하게 잘 돌보아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탄식하며 말씀합니다. “쯧쯧쯧...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러분!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그저 우리에게 종교 의식만 요구하고 윤리와 도덕 및 봉사와 충성, 그리고 희생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면 스트레스가 다가옵니까? 괜히 자유가 속박되는 답답함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을 때 오늘의 말씀에 입각하여 믿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로서 나의 의식주를 책임져 주시는 분, 나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이 내가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고 있는 분, 그래서 내가 세상 염려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하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의 의식주의 문제조차도 해결해주시지 못하는 아주 무능한 분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들의 의식주의 문제에 대하여는 “그것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나는 모른다.” 하고 무관심하고 아무런 역사도 안하시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눅12:29-30) 즉 그런 의식주의 문제는 기본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하지 않아도, 기도하지 않아도 다 공급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아멘을 못하면 들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아멘할 겁니다. “야- 미천한 나도 하나님이 돌보아주고 있는 것을 믿고 아멘을 하는데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왜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니? 쯧쯧쯧... 믿음이 나보다 적은 자들아!“
물론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의식주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면 그만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의식주의 문제는 결국 돈의 문제인데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돈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이 질문에 제대로 진리를 아시고 체험이 확실한 분은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하나님이 다 주신 거예요. 내가 돈 번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거구요. 나는 이 땅에 태어날 때 일 센트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때로는 부모님을 통해서 주시는 돈도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에요.”
이런 분들은 그 소유관이 확실합니다. “내 것은 다 하나님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나는 다만 청지기일 뿐이다.” 이 정도 깨달음이 있으면 상당히 괜찮은 성도입니다. 이런 분들은 돈 때문에 그리 시험 들지 않습니다. 성경은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일단 돈에 시험 들지 않을 정도면 제가 단언하건데 매우 괜찮은 성도입니다. 한번 옆에 분들에게 인사해 보시다. “그런 분이 바로 당신이군요.”
그리고 본문 31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너는 내 걱정을 해라. 그러면 내가 니 걱정을 해줄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내 일을 걱정하고, 내 일을 챙기고, 내 앞가림부터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반대로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진심을 드리면 주님께서 내 일을 다 책임져 주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빈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내 인생걱정하고, 내 인생 설계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돌봐 주시는 것이 훨씬 더 좋고 best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의 역사 속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는데 그 인생이 잘못되고 망한 케이스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일 자기가 챙기고, 자신이 머리 돌리고 계산해서 자기 나름대로 한 사람은 잘 되는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이상하게 일이 꼬이고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안 도와주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장래를 맡기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멍청하게 보이고 망할 것 같아도 이상하게 더 잘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드린 만큼만 갚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much more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외국 땅에 살면서 우리는 너무도 많이 걱정하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 돈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에게 돈이 얼마만큼 필요한지 내가 다 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해라. 그러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준다. 그리고 잊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느니라.”(눅12:32)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좋아도 잠시 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에는 주님이 더하여 준 그것들도 결국 다 놓고 가야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의 것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나라까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주님께 참 받는 것이 많습니다. 땅의 것도 받고 하늘의 것도 받습니다. 그리고 먼저 주님의 일에 힘쓰는 사람들은 더하여 받습니다. 아무쪼록 더하여 받는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