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이 중요하다.

날짜: 
2021/08/08
말씀: 
신8:2-3
말씀구절: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꿈보다 해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꿈을 꾸게 되도 그것을 해석하기에 따라 좋은 꿈이 될 수 있고, 나쁜 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성경구절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마귀의 말이 되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6:15-16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증명해 보인다고 사람들 앞에서 용감하게 독약을 마셨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즉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짜이고 거짓일까요? 이것 역시 해석을 잘못해서 일어난 비극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고 난 후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마4:6) 이 말은 시편 91:12을 그대로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예수님을 시험에 빠트리려는 파괴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단의 경우를 보면 우리와 똑같은 성경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석을 이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의 해석은 아닐지라도 성경을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서 교단과 교파가 갈라지게 됩니다. 특히 구교인 가톨릭과 신교인 기독교가 나뉘게 된 근본적 원인은 성경해석의 차이입니다.

마태복음 16:18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가지고 구교는 베드로가 예수님에 의해 초대 교황이 되었고, 오늘날의 가톨릭 교황은 그 뒤를 잇는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따르지 않는 개신교는 사이비라는 것입니다.

반면 개신교는 “그런 엉터리 같은 해석하지 마라. 우리는 너희들의 그런 교황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교와 신교가 하나가 될 수 없고 나눠지게 되는 겁니다. 또한 장로교와 감리교가 하나가 되기 힘든 것도 성경해석의 차이입니다. 장로교는 칼빈의 예정론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예정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감리교는 알미니안의 의지론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에 따라서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이렇게 해석이 정반대가 되니 장로교 신자와 감리교 신자가 성경공부를 하면 이것 가지고 죽어라고 싸웁니다. 그러니 같이 성경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싸울 바에야 서로 교단을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순복음의 경우는 예정론과 의지론 중 어느 것을 따를까요? 둘 다 따릅니다. 성경에는 예정론도 있고 의지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에 따라 예정론과 의지론을 따르는 비율에 차이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목사님이 나이가 젊어서 혈기왕성하면 의지론을 따르고,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가까우면 예정론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예정론과 의지론 뿐만 아니라 교단마다 성경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목사고시 시험을 칠 때 순복음 목사가 되려는 분이 장로교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순복음 목사가 될 수 없고, 반대로 장로교 목사가 되려는 분이 순복음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장로교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민교회의 경우는 여러 교단에서 오신 성도님들이 있기에 각각의 교단과 교회에서 나름대로 배운 성경 지식이 있습니다. 고로 이민 교회의 경우는 이런 면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저의 경우는 가능한 다른 교단의 여러 해석을 같이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들을 서로 비교해줍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닙니다. 특히 요즘은 종말론에 대한 성경 해석 때문에 이단을 비롯해 각 교단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이 가까운 것은 아는데 종말론에 대한 언급을 잘 안합니다. 대충 넘어갑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천지 이단의 경우는 종말론 이단입니다. 그들은 종말론에 대해 많이 가르칩니다. 그래서 일반 정통 교단의 성도님들이 종말론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 이단에 많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종말론에 대해 쉽게 풀어서 지은 책이 ‘디데이’입니다.

성경에 보면 해석에 따라 개인과 가정,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 마귀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에이, 그것 먹어도 안 죽어. 그거 먹으면 눈이 밝아져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결국 사단의 해석을 따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의 죽음, 즉 하나님과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유전인자가 우리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어떤 해석을 따르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눠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남한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을까요? 이것 역시 해석의 차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마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가 더 좋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일부 남한 사람들 중에는 북한 공산주의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배웠고, 그런 해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모순됩니다. 자신들은 공산주의라고 하면서 실지는 자유 민주주의의 부요와 혜택을 더 많이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바른 해석을 내림으로서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습니다. 더 나아가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해 끊임없이 계속되는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 위협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남한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고 세계 속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즉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시편 119편의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즉 고난이 다가와 당장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큰 유익이 될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아멘입니까? 오늘의 본문에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높이지 않고 도리어 낮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에서 터벅터벅- 걷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너로 배고프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왜요?

아직 제대로 믿음과 인격이 갖춰지지 않았는데, 교만한 소지가 다분히 보이는데 갑자기 부요와 축복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살게 되면 그만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잘나서 잘되고 복 받은 줄 알고 그만 교만해지고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고난의 과정을 겪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로 현재의 고난이 나중에는 진짜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결론입니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불행도 해석하기에 따라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가난과 궁핍도 해석하기에 따라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슬픔과 괴로움도 해석하기에 따라 도리어 기쁨과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무쪼록 하나님이 주신 맘으로 바르게 해석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귀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