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날짜: 
2006/02/12
설교: 

창1:14-19 해와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창세기 1장을 보면 여러 가지 의문점이 풀리기도 하고, 반대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도 합니다. 의문점이 풀리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은 우연적으로 진화론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문점이 생기는 것 중에 하나는 본문에 분명히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만들었으므로 낮과 밤은 넷째 날부터 시작이 되어야 하는데 첫째 날부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초적인 과학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낮과 밤은 분명 태양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해가 떠올라야 아침이 오고 낮이 되며, 해가 지면 저녁이 오고 밤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첫째 날은 태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낮과 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는 24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연대를 가리킨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첫째 날 만든 빛은 태양이 아니므로 이 빛은 또 다른 빛 혹은 또 다른 에너지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빛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창조의 첫째 날에 비추던 그 빛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고로 하나님이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난 후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라고 하신 창세기 1장 4절에서의 빛과 어두움은 창세기 1장 18절에서 넷째 날 태양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 그 태양에 의하여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빛이 태초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비취어져 어두움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태양 빛이 아닌 그 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쐬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신 예수님을 아는 빛이 비추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두 광명 곧 해와 달을 만드셨는데, 큰 광명인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작은 광명인 달로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시고는 그 운행과 질서를 지켜 이 땅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지구를 중심으로 달이 돌아감으로 밤낮과 징조와 사계절과 날자와 연수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하루도 어김없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쉼 없이 움직이며 정확한 그들의 길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는 원둘레가 4만km이며, 직경이 12,800km로 수천 억 톤의 커다란 공과 같은데, 그것이 우주 공간에 떠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가득 싣고 시속 1,600km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팽이처럼 자전하면서, 초속 26.7km의 환상적인 속도로 공전하고 있는데 그 시간이 정확하게 365일 5시간 48분 48초라고 합니다.
또 달은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돌면서 지구와 같이 태양을 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태양계의 9개의 혹성도 태양을 중심으로 같은 방향으로 한번의 부딪힘 없이 어김없이 자기의 궤도를 정확히 돌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가 아닌데도 그것들이 서로 자기의 길을 알아서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은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잠깐 동안만 우주의 운행에서 손을 떼시고, “태양아, 지구야, 달아, 별들아, 단 1초만 네 마음대로 돌아 버려라”라고 하시면 이 우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해와 달과 별들을 붙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입히시고 먹이신다고 하셨고, 하물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그 자녀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로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도 세밀하게 돌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14절을 보십시오. “…또 광명으로 징조(徵兆)와 사시(四時)와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이 이루라” 여기서 우리가 함께 살펴야 할 말씀은 ‘징조’라는 단어입니다. 이 ‘징조’라는 말을 두고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해석은 정반대로 갈라집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징조’를 정해진 운명의 표시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태양과 달과 별들의 변화의 징조를 살펴보고는 자신들의 운명을 점쳤습니다.
한국에는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에 떠오르는 첫 태양을 보기 위하여 동해로 몰려듭니다. 그리고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떠오르는 태양에 자신의 운명을 기대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과도 같습니다. 만일 태양이 시커먼 구름에 가려져 있으면 그 해 내 인생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무슨 액땜 굿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달을 보면서 운명의 여신을 생각했습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인생의 운명도 저 별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커다란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무슨 큰 인물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천체의 변화에 인생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그 징조를 부지런히 살피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여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징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태양과 달의 뜨고 짐에 따른 여러 가지 나타나는 일기의 변화들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살피면 무엇이 유익합니까? 예를 들면 저녁 때 노을이 지나치게 붉게 물드는 것은 날씨가 더워질 것이라든지, 태양이 뜨는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면 밤낮의 길이가 변한다든지, 앞으로 태풍이 불어오거나 큰 비가 내릴 것 같은 조짐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여 두었다가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다가올 재난이나 위험을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늘과 달과 별들의 징조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해와 달과 별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탐구의 대상입니다. 면밀히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을 연구하여 그 징조를 찾아내고 이용함으로 씨를 뿌릴 때에 씨를 뿌리고, 거둘 때에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면서 운명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며 우리를 이들보다 더 세밀히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인정하게 되고 이러한 솜씨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19: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과학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달이 태양보다 더 가까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햇빛이 달빛보다 더 밝은 거죠? 단순히 크기 때문인가요?”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태양과 달이 지구에서 보기에는 크기가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태양이 달보다 수천 배가 더 큽니다. 그리고 태양은 핵융합 반응을 통해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입니다. 그리고 지구처럼 항성의 주위를 도는 천체는 행성이라고 하고, 달처럼 행성의 주위를 도는 천체는 위성이라고 합니다. 이 행성과 위성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항성의 빛을 일부 받아서 빛이 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달은 태양보다 훨씬 어둡습니다.”
이를 밝기의 단위인 럭스(Lx) 즉 조도로 표시하면 맑은 날 태양의 조도는 5000럭스 이상이고, 밝은 날 달빛의 조도는 1-10럭스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햇빛이 달빛보다 최소 500배 이상은 된다는 말입니다. 고로 햇빛은 바로 보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데, 달빛은 그냥 보고 있어도 눈부시지 않고 은은하고 낭만적으로 비추어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치료는 약한 달빛이 강렬한 햇빛이 되는 것처럼 아주 신속하게 임하므로 우리의 상처가 신속하게 아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상처도 하나님의 치료로 신속하게 아물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낮에는 왜 달과 별들을 볼 수가 없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물론 달과 별들도 낮 동안에도 하늘에 떠 있습니다. 그러나 낮에는 햇빛이 너무나 밝기 때문에 달과 별들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사60:19)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13:43) 즉 천국은 햇빛보다 더욱 강렬한 하나님의 빛이 비추므로 별빛도 달빛도 햇빛도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햇빛처럼 밝게 빛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 천국에서 저와 여러분들도 반딧불이나 전등불이 아닌 햇빛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별들에 대하여 성경은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대략 6000-8000 개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산이나 지평선과 같은 여러 장애물이 있어 하늘의 한 귀퉁이밖에 볼 수 없으므로 보통 보이는 것은 3천여 개 정도입니다. 물론 망원경을 쓰면 좀더 많은 별을 관찰할 수 있고, 큰 천체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놀랍게도 30억 개나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숫자일 뿐, 우주에는 아직 우리 인류가 본 적이 없는 별들이 많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물론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크게 번성할 것을 예언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아주 많아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별들도 성경에 보면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147:4)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별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아주 세밀하게 돌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종종 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탄생할 때 하나님이 그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하늘에 비추게 하시므로 동방박사들이 그 별을 보고 베들레헴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친히 자신을 가리켜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셨습니다.(계22:16) 즉 예수님은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해와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크고 정교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 분이 우리를 보살펴주시고 있다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외국 땅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마음에 담대함과 용기를 줍니다. 고로 이 외국 땅에서도 보이는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별들을 바라보게 하시며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마침내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소망찬 전진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