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과 실상

날짜: 
2007/02/04
설교: 

고후5:17 허상과 실상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만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 있고, 반면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는 존재하는 실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기루는 우리 인간의 눈에도 보이고 사진기에도 찍히지만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그러나 전기나 전자파는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사진에 찍히지도 않지만 실제는 존재하는 실상입니다.
만약 인간의 눈에 보인다고 허상인 신기루를 좇아가면 크게 낭패를 당하고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실상인 전기나 전자파를 무시하면 역시 크게 해를 당할 수도 있고, 반면 이들을 잘 이용하면 인류에게 큰 발전과 편리함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 한해 축복을 받고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허상과 실상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허상과 실상을 살펴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우리의 허상과 실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즉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냈던 과거의 내가 있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살고 있는 현재의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서울에 장씨와 이씨라는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씨가 대전에 장사하러 갔다가 한 달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서울로 다시 돌아온 이씨는 늘 하던 버릇대로 술상을 차려놓고 술친구인 장씨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이보게, 나 대전에 가서 장사하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네. 오늘 저녁에 우리 둘이 만나서 건어하게 취해보세!”
그런데 심부름하는 사람이 쪽지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그 쪽지를 펼쳐보니 놀랍게도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장씨는 한 달 전에 죽었습니다.“ 그 쪽지를 받아본 이씨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다정한 나의 술친구가 죽다니!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나!” 이씨는 친한 술친구인 장씨가 죽었다는 쪽지를 받아보면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어두운 밤에 장씨 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씨는 죽은 친구인 장씨의 미망인이 나올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을 확 열고 누가 나오는데 죽은 장씨가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씨는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장씨는 이것이 죽은 장씨의 유령인 줄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야, 이 사람아 생전에 나하고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슨 원한이 있어서 죽어서도 유령으로 내게 나타나느냐?” 그러면서 이씨가 놀라서 달아나려고 하니까 장씨가 이씨를 붙잡습니다. 이씨는 유령인 장씨가 자기를 붙잡고 같이 죽자고 할까봐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하던 장씨가 말합니다. “이보게 친구, 나 죽은 유령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어!” 이씨는 반신반의하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왜 죽었다고 쪽지를 보내나?” 그러자 장씨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자네가 대전에 장사하러 갔을 동안에 나는 예수를 믿고 거듭나게 되었네. 술 먹고 방탕하던 옛날 장씨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지내 버리고,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되어 새사람이 되었네. 옛날의 장씨는 죽은 허상이고, 새로 거듭난 지금의 모습이 나의 실상이네! 허상인 옛날의 장씨는 자네하고 술 먹고 방탕했지만, 지금의 나는 예수님과 더불어 살게 되었으니 더 이상 술 먹고 방탕할 수가 없네. 이제 자네도 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되네.”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 새롭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이전에 세상에서 행하던 죄와 마귀의 세속적 유혹에 빠진 모습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자신의 실상을 찾은 사람은 더 이상 허상의 노예가 되거나 허상에 따라가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허상인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했고, 실상인 새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허상인 옛사람은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아 죄를 친구로 삼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에 끌려 다니며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맛보며 저주 속에 살았습니다. 마귀는 죄를 정복하지 못한 우리의 허상을 늘 비웃고 우리의 허상을 파괴했지만, 이제 예수님 안에서 죄를 정복한 실상인 우리를 더 이상 저주하거나 파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도 이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된 허상에 끌려 다니며 방탕한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를 이긴 나의 실상을 찾았고, 그 실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병도 허상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질병은 정말로 무서운 실상이었습니다.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생해본 사람은 질병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인지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질병을 보면 질병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질병은 옛날에 그렇게 우리를 물고 찢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질병은 2천년 전에 이미 정복당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2천년 전에 법적으로 우리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고로 눈에 나타나는 질병은 허상이요, 건강한 우리의 모습이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나타나는 질병의 허상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근심하지 마십시오. 허상인 질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호히 물리치시고, 새로워진 건강한 실상을 찾으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손을 얻은 즉 허상인 질병은 떠나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활의 저주와 가난도 허상입니다. 가난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해본 사람들은 가난이 주는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당시에는 육성회비라는 것을 내야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난하여 육성회비를 제때에 내지 못하면 그 학생이 선생님에게 불려가 벌을 받습니다. 때로는 모든 아이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고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정을 잘 아시는 부모님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난이 주는 큰 고통에 크게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이러한 고통스런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자녀들의 공부에 열을 내었습니다. 즉 공부해야 돈을 벌 수 있고, 그래야 가난의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사람들은 가난을 정복하기 위하여 오늘도 나름대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이러한 가난과 생활의 저주를 이미 정복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일점일획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즉 저주받는 모습은 허상이요 축복받는 모습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자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9:8) 여러분, 이것은 실상의 선언인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 안에 들어온 우리는 이제 저주와 가난을 허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 안에서 축복을 받은 자다.“라고 외치며 오늘도 당당히 이 외국 땅에서 축복을 받고 살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도 허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보고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너희 쏘는 것이 어디냐?”고 죽음을 조롱했습니다. 죽음이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파멸이요, 절망이요, 영원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니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멸하시고 생명과 부활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고로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고, 영생이 우리의 실상이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부정적이고 원망적인 허상을 좇아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매사가 긍정적이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모습이 우리의 실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죽은 허상은 불평하며 말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 이젠 죽겠다. 모든 것이 왜 이 모양이냐?”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능력을 주시므로 나는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도와주셔서 일이 잘된다. 참으로 감사하다.”
여러분, 우리가 허상을 좇아가면 우리의 인생은 파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실상을 찾았고, 그 실상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죄에 눌려 고통 가운데 사는 것은 우리의 허상이요, 용서받은 의인으로 떳떳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또한 늘 질병을 끼고 사는 것은 우리의 허상이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고 외치며 건강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가난과 저주에 빠져 사는 것은 우리의 허상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사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사망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허상이라면 부활과 영생을 끼고 사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 속에 사는 것이 우리의 허상이라면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옛사람의 허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불행하게 살지 마십시오. 새롭게 변화된 자기의 실상을 바라보며 이 외국 땅에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