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의 복, 불통의 복

날짜: 
2021/11/14
말씀: 
시122:6-7
말씀구절: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설교: 

어떤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동생이 성경을 읽다가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 만사형통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야?” 형이 대답합니다. “응, 만사형통이란 무슨 일이든지 형을 통해서 해야만 일이 잘된다는 뜻이야.” 이 글을 읽고 제가 피식- 웃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냥 피식- 웃으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속으로 이렇게 정정해서 말했습니다. “형을 통해서 해야 형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해야 형통한 것이지!”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먹고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을 결코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잠시적이고 찰나적인 형통보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형통을 더욱 우선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형통의 비결 혹은 형통의 방법을 찾을 때에도 딴 데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에서 형통의 비결을 찾습니다.

김성주 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2003년 CNN의 ‘New Century Leader’로 선정된 사업가입니다. KOSTA 강사로도 서신 분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이런 제목이 있습니다. “나는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 책 제목이 참 마음에 와 닫습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할 때 한 선배가 그를 부르더니 한국에서 성공하는 법 세 가지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첫째, 술을 잘 마셔야 하고, 둘째, 거짓말을 잘 해야 하며, 셋째, 흰 봉투를 잘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인이기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분명히 정직한 손으로도 사업을 일으키는 사례를 만들 수 있을 거야 하면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당장 흰 봉투 즉 뇌물을 바치지 않으니 멀쩡하게 면세점에서 잘 팔리던 브랜드가 퇴출당하지 않나, 그를 세 시간이나 서 있게 하고는 3분도 채 만나 주지 않고 쫓아내는 바이어가 있질 않나, 백화점에 있던 물건이 몇 백만 원 어치씩 사라지질 않나, 세관원들조차 물건이 안 왔다고 거짓 보고를 하는 등... 그가 경험한 ‘부패의 역사’는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면세점 사업은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99.9%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1997년 전체 한국 면세점의 5분의 1을 대행하며 당당히 한국 최고의 면세점 에이전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정직하게 나가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잠14:1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24:1)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은 거짓으로, 세상적인 잔꾀로, 권모술수로 돈과 지위와 명예를 얻는 것을 결코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안에서 정직 그 자체를 형통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정직하다가 세상적으로 불통할지라도, 손해를 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더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통한 잠시의 형통은 나중에 큰 수치가 되고, 회복하지 못할 불통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는 자로서 거짓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7) 여러분, 우리가 정직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만나주시고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형통의 비결에 대하여 몇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편 122:6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하고 사랑하면 형통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반면 교회를 미워하고, 교회를 멀리하면 불통하게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자꾸 교회에 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니 결국 형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고 시험에 들면 교회가 싫어지고 교회를 멀리합니다. 결국 불통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역대하 13:12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 이 말씀은 우상숭배를 하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남왕국 유다가 큰 전쟁을 치를 때 남왕국 유다의 아비야 왕이 북왕국 군사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80만 군인이요, 남왕국 유다는 그들의 반 밖에 안 되는 40만 군사입니다. 숫자로 보면 북왕국이 훨씬 유리합니다. 더구나 전쟁 초기에 북왕국이 복병 작전을 펼쳐서 남왕국 군사들이 앞뒤로 포위를 당했습니다. 이제 남왕국 군사들이 큰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제사장들도 나팔을 불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의 소리를 듣고 북왕국 군사들을 쳤습니다. 결국 북왕국 군사 50만 명이 죽고 남왕국 유다에게 항복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 자손이 이기었으니 이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을 의지하였음이라.”(대하13:18)

반면 북왕국이 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군사들의 숫자만 믿고 하나님을 믿는 유다 백성들과 싸웠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그라운드가 있는 나라나 백성들과 싸우면 형통치 못하다는 경고를 싹 무시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자고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교회를 대적하면 결국 형통은 멀어지고 불통이 갑자기 닥치게 되고 맙니다.

형통과 불통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유다 왕 웃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대하 26:4-5 말씀입니다.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그러나 그가 강성해지자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제사장 아사랴가 왕을 만류합니다. “왕이여, 이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구별함을 입은 제사장만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 왕은 성소에서 속히 나가십시오.”

그러나 왕이 하도 잘 나가다보니까 자기 위치를 그만 까먹었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말하는 제사장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즉시 웃시야 왕의 이마에 문둥병(한센씨 병)이 발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웃시야 왕은 죽는 날까지 별채에 갇혀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한때 그렇게 형통하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불통으로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형통하고 무엇 때문에 그가 불통해졌습니까? 겸손히 하나님을 구할 때에는 형통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까먹고 교만해졌을 때에는 불통이 찾아왔습니다. 즉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라는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성경은 형통의 비결과 불통의 요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128:1-2)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즉 하나님 말씀을 따라 하나님 잘 믿고, 악에서 떠나면 형통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결을 알고 이런 비결대로 살면서 형통을 체험한 다윗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게 이렇게 유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3)

그리고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7-8)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겸손히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잘 믿어 형통의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좀더 고차원적인 불통의 복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원래는 ‘불통의 저주’라고 해야 하지만 성경에는 종종 불통이 나중에 보면 큰 형통과 축복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의 체험을 한 분들은 “아하, 이게 당장은 불통 같아 보이지만 나중에 큰 형통과 축복이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불통 속에서도 도리어 감사를 할 수 있고, 결국 나중에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불통을 통한 큰 형통과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자성어로 ‘전화위복’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불통이 나중에 큰 형통으로 바뀌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요셉이란 사람이 그렇습니다. 17살에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인신매매를 당하여 노예로 10년간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주인 마나님의 성적 유혹을 뿌리치다가 도리어 강간범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3년간 억울한 옥살이도 했습니다. 도합 13년간 그는 지독한 불통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는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보는 형통의 관점과 하나님이 보는 형통의 관점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어떤 투기나 우연한 사건으로 횡재를 하거나 출세를 하면 형통했다고 말을 합니다. 즉 649 복권이나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굉장히 재수가 좋고 형통 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복권의 끝자리가 맞지 않아 꽝, 즉 영어로 nothing이 되면 재수가 없다고 말하며 불통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형통은 육신의 삶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형통한 것이고, 돈이 적어지면 불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잘 다니는 직장에서 잘리면 크게 불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근심하며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보는 형통의 관점이라면 요셉은 결코 형통한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의 형통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없는 좋은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 중에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을 형통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초대 교회에 수많은 성도들이 모진 핍박과 환난을 겪고 심지어 심한 악형을 받아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놓고 볼 때 세상 사람들은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은 단지 환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큰 영광이요, 귀중한 형통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단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단지 고통의 면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고통 후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요셉의 생애 중에 그 어렵고 힘든 과정은 참으로 귀하고 유익한 삶이요,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요셉의 형통한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많은 사건들, 그리고 어려운 시련들, 혹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삶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형통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불통 속에서도 도리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형통함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