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신앙

날짜: 
2005/07/11
설교: 

마10:16 환경과 신앙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다가, 좋은 환경의 이익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나쁜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나쁜 환경 속에서 자라다가, 나쁜 환경의 영향을 받아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원하든 원치 않던 환경 속에서 살게 되고,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환경이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① 아주 좋다. ② 대체로 좋다. ③ 아주 나쁘다. ④ 대체로 나쁘다. 또 다른 질문입니다. 여러 가지 관점이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캐나다의 환경과 한국의 환경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까? ① 캐나다의 환경이 좋다 ② 한국의 환경이 좋다 ③ 둘 다 비슷하다 ④ 모르겠다.
이곳 캐나다까지 이민이나 유학 온 저와 여러분들은 아마 한국보다 이곳 캐나다의 환경이 더욱 좋기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환경을 찾아간다는 것은 동물뿐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곳 캐나다에 올 때 어느 도시로 가야 되느냐를 놓고 저울질을 합니다. 자신의 목적에 맞는 좋은 환경을 선택하기 위함입니다. 다행히 원하던 좋은 환경을 만나서 원하던 목적을 달성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꼭 좋은 환경 속에서만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나쁜 환경을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지금 온통 죄악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마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이 이리들 가운데 들어갔으니 얼마나 환경이 어렵습니까? 그러한 환경에 빠진 양은 얼마나 불안하고 무섭고 스트레스를 받겠습니까?
그러나 이럴 때 주님은 그러한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가정에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술 취한 아버지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형제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20년 후 형제의 인생은 완전히 갈리고 말았습니다. 형은 의과대학의 저명한 교수가 되어 '금주운동'을 전개했고, 동생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동일한 답변을 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때문에..."
형은 비극적인 환경을 교훈 삼아 희망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동생은 환경의 노예가 되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도약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절망의 늪에 함몰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환경을 탓하기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하나님께 뭐라고 핑계를 댑니까?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즉 하와는 자신의 죄가 뱀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담은 또 뭐라고 핑계를 됩니까?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라고 말을 합니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항상 핑계대기를 좋아합니다. “가난 때문에, 돈 때문에,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환경이 나쁘기 때문에...때문에, 때문에, 때문에...”
물론 그런 환경 때문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꼭 절대적인 원인일까요? 성경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은 배다른 형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하여 노예로 팔려가는 악한 환경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였고, 사도 바울은 옥중이라는 절망의 환경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쁨을 누렸습니다.
반면 경건한 유대인 혈통에서 태어나 개신교인이 된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자가 되었고, 공산 독재자 '스탈린'은 신학교까지 다닌 사람이었지만 그 신학교 시절에 오히려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한 뒤 정신병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죽은 독일의 무신론자 '니이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던 가정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즉 좋은 환경이라고 좋은 신앙인이 나오는 것이 아니며, 나쁜 환경이라고 나쁜 신앙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환경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는 "공부방이 없다. 과외를 못해서 그렇다. 학교가 나빠서 그렇다."고 탓하지 말고 스스로 공부에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즉 환경이 나쁘면 환경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했지, 환경에 굴복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리 가운데 있는 양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했지, ‘이리 때문에’라고 핑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2. 나쁜 환경을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금세기 초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지휘자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토스카니니’라고 하는 명성 있는 지휘자입니다.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로서 심한 근시로 인해 연주 중에는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주 때마다 연주할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그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단원들 중에 누군가에게 지휘를 대신 부탁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선발되어서 임시 지휘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만약 토스카니니가 그토록 시력이 나쁘지 않았다면 유럽의 한 첼로 연주자에 불과 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더 큰 능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아니했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할렐루야!
나쁜 환경을 기회로 활용한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는 53세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는 말단 공무원으로 취직을 했다가 곧 해고됐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는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전쟁 때 입은 왼손의 부상은 그를 항상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 실수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는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뜨거운 창작의욕을 느꼈습니다. 그 열정으로 쓴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400여 년간 전 세계인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는 ‘돈키호테’입니다. 역경을 재도약의 기회로 삼은 이 작가의 이름은 ‘세르반테스’입니다.
여러분,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최상의 환경은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최악의 환경만이 나의 앞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조차도 믿음의 사람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최상의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자고로 명포수는 맹수를 만나야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쁜 환경조차도 좋은 기회로 활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악한 환경에 스스로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시다시피 갈대아 우르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아브라함도 그들을 본받아 우상숭배자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환경을 떠나야 합니다. 죄악의 환경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산에서 조용히 도만 닦던 어떤 수도사가 세상 구경이 너무도 하고 싶어 내려왔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연극을 보러갔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수도사는 "야! 거 세상 재미가 괜찮구나!"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수도사인지라 스스로 "오! 이놈, 너 마귀야, 네가 아무리 사람을 잘 시험하기로서니 나같이 수십 년 수도한 사람을 다 시험하느냐?" 하고 마귀에게 말하자, 마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수도했으면서 어찌하여 내 영토 속에 들어왔소?"
여러분,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영토라고 생각되는 죄악의 환경을 배회하면 결국 죄를 짓기 쉽습니다. 낚시질을 해 본 사람은 알지 않습니까? 낚시 미끼 주위로 뱅뱅 도는 물고기는 잡히기가 쉽습니다. 무엇 때문에 마귀가 던진 낚시 미끼 가까이 뱅뱅 돌아다닙니까? 마귀가 주장하고 있는 죄악의 영토를 멀리해야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악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우리는 성경에서 악한 환경에 빠졌던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음란과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하여 갔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 도시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 롯의 아내는 죽고, 그의 두 딸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만연된 음란한 문화에 영향을 받아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성관계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캐나다의 문화는 어떻습니까? 많은 분들이 자녀들 유학 보낼 때 절대 혼자 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더구나 딸은 절대로 혼자 보내면 안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실 분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여기 캘거리가 밴쿠버나 토론토보다는 괜찮다고 하지만 어쨌든 부모님을 떠나면 쉽게 죄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유학 생활의 환경이기에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유학생을 둔 어떤 어머니가 외국에서 자취를 하는 자기 아들의 방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의 벽에는 노출이 심한 여자들의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얼굴이 화끈했지만 아들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말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 외국의 아들에게 한 상자의 생일 선물을 보내며 그 속에 예수님의 사진도 하나 넣었습니다.
그 아들은 선물을 받고 감사하다는 편지를 해왔지만, 그 예수님의 사진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 그 어머니가 아들의 자취방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벽에 예수님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선물한 그 사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벽에 걸려 있던 좋지 않은 사진들은 하나도 눈에 띠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기뻐하면서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이 방이 전보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구나! 새 벽지를 발랐니? 내가 전에 왔을 때는 저 벽에 지금보다 더 많은 그림들이 붙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그래요, 어머니. 하지만 어머님이 보내준 예수님의 사진이 이 방에 들어온 후부터 다른 그림들은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옛날의 사진들은 모두 띠어 버렸어요.”
그렇습니다. 그 아들의 방에 예수님의 사진이 들어오자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방에는 어떤 그림들이 걸려 있습니까? 거룩하신 예수님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을 집 안에 버젓이, 혹은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자취방의 학생처럼, 오늘 당신의 집을 새롭게 정리하십시오. 새로운 좋은 환경을 꾸미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거한 그곳에 찾아오셔서 마음껏 당신을 축복하시도록 하십시오.
말세의 아무리 나쁜 환경이라도, 주위의 아무리 악한 환경이라도 그 환경에 물들지 말고, 오히려 그곳을 변화시키십시오. 이리 떼가 들끓고 있는 극한 환경 속이라도 지혜롭게 순결하게 그곳에게 버티십시오. 이곳 캐나다 캘거리라는 외국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과 교제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환경 속에서 너와 내가, 우리의 자손들이 다같이 복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