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오늘은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라 좀 특수한 가정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어엿한 가정이었지만, 이제는 깨진 가정이 돼서 차마 이 가정을 가정으로 부를 수 있겠나 싶을 만큼 풍비박산이 된 가정입니다. 이 가정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유대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땅에 아주 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은 온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요단강 건너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얼마 동안은 그럭저럭 살았는데, 어느 핸가 가장인 엘리멜렉이 갑자기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는데, 그 아들들이 거기서 모압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한 십 년 쯤 살다 보니까 웬만큼 기반을 잡았나 싶었는데, 아 이게 또 웬일입니까? 일 이년 사이로 두 아들이 다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됐습니다. 졸지에 과부 셋이 생긴 겁니다. 여러분! 과부들 셋이 모여 사는 가정을 어찌 가정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고대 세계에서 여자들이 남자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과부 셋은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진 겁니다.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따뜻한 둥지로 회복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놀랍게 쓰임 받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 가정이 결국엔 회복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으면서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먼저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자기 가정 속에 닥친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돌아보고, 회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1:20-21을 보니까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지금 자기더러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라의 의미는 '쓰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기쁘게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자기 뜻대로만 됩니까? 도리어 쓰디 쓴 인생이 될 수가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나오미는 지금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매우 힘들다."
이런 쓰디쓴 고통 속에서 그녀는 입을 열 때마다 돌아가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룻기 1장에만 '돌아가다'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옵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녀는 자기 인생과 가정에 불어 닥친 고통의 원인이, 자기 땅에서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 땅에 흉년을 주셨을까요? 가끔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일종의 훈련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는 겁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가정은 그 메시지를 듣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고통을 피해서 이방 땅 모압으로 떠났던 겁니다. 좀 더 편해 보려고, 좀 더 행복하려고 유대 땅을 떠났던 겁니다. 그녀는 바로 그것을 회개한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한 일을 바라보니 그건 너무나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나오미는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후손으로 기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을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는 이방 여인들과 결혼시켰던 겁니다. 그런데 이 지경이 되고 보니 그렇게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자기를 돌아보게 된 겁니다. 그리고 깨달은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이 내게 주신 사명보다는 내 편안함과 유익을 좇아서 선택했던 내 태도가 오늘의 이런 불행과 어려움을 불렀구나!'
그래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고, 믿음으로 다시금 새 인생을 살기로 작정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갈 때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었습니다. 힘도, 젊음도, 돈도, 남편도, 아들들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두 사람, 며느리들마저 그들의 친정으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자기가 늙었기에 며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홀로서기를 하려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내 남편 의지하고, 내 돈 의지하고, 내 자식 의지했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결단이 며느리들까지 돌려보내겠다는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원치 않는 인생은 아닙니까? 또는 지금까지의 삶을 뒤돌아 볼 때 후회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을 섬세하게 주관하시고, 각자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구원시키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우리의 가정과 내 삶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면,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될까요? 혹시 나오미처럼 하나님이 나에게 있으라고 명하신 그 땅을 떠난 건 아닙니까? 나에게 살라고 하신 그 삶의 모습을 버리고, 나 편한대로,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내게 주신 나름의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저버리고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그렇게 살았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회복의 첫 단계인 겁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6:1-2)
우리 중에는 자식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이가 먹어서도 자식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도 오히려 더 기도해 줄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의지하려고 맘먹으면 실망하게 되고 삶의 허무감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남편을 의지하고 아내를 의지하십니까? 그것도 안 될 말입니다. 오늘 세 과부처럼 우리는 어느 날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도 홀로 될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면 언젠가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한테 "정말 그럴 줄 몰랐어!" 하면서 울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오직 믿을 이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을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사랑할 대상일 뿐입니다.
나오미가 하나님 없이 산 자기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산 나의 인생을 '마라'라고 인식할 때, 거기서부터 진정한 회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나오미처럼 결국에는 그 이름을 되찾아 나의 인생을 '기쁨'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회복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제 나오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두 며느리가 걸립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때 룻이 울며 대답합니다.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자- 젊은 과부 며느리의 입장에서 시어머니는 오히려 짐이 됩니다. 더구나 며느리의 입장에서 문화와 풍속과 언어와 종교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낯선 이스라엘로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결국 오르바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시어머니와 헤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룻은 계속하여 시어머니를 좇아갑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초월한 사랑이요, 효도입니다.
룻이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며느리 룻의 신앙이 대단합니다. 그녀는 시집와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에이, 이거 이스라엘의 하나님 별 볼일 없구나!" 하고 도리어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도리어 그러한 하나님이 끝까지 나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얼마나 마음이 찡-하셨을까요? 저와 여러분도 어려울 때에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찡- 하게 해드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찡- 하게 감동이 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어려울 때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으면 하나님이 그 다음을 책임져 줍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 가정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같은 가문의 보아스에게 며느리 룻을 시집보냅니다.
그리고 룻이 아들을 낳자, 주변 사람들이 그 아들은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서 이름을 '오벳'이라고 붙이는데, 그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혈통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다시 기쁨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룻도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킨 그들을 통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힘드신 분이 있습니까? 인생이 쓰디쓴 마라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찡- 하게 감동을 시키십시오. 그런 분을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회복의 역사를 써내려 갑니다. 아무쪼록 그 주인공이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