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보상의 법칙

날짜: 
2006/12/10
설교: 

막10:29-31 희생과 보상의 법칙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세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다. 오직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가기 위해서만 믿는 것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복음이란 것은 단순히 현세에서 영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윤리와 도덕적인 관계는 있으되 실제적인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복음 증거는 천국 복음 뿐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현세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마귀에 묶인 자를 놓여나게 해주셨으며, 현세에서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현세에서 배고픈 자를 먹여주었으며, 현세에서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고, 현세에서 죽은 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들의 현실적인 모든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현실의 삶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신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어떠한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복음을 위해서 그 집이나 부모나 처자나 전토를 버린 자는 이 땅에서 백배나 받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막10:29-30) 오늘의 이 말씀에 입각하여 우리는 복음과 현실적인 삶에 관해서 살펴보므로 같이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복음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될 것인가?
여러분, 사람이 살면서 관심을 끄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사건, 국제적인 사건, 전쟁과 다툼의 사건, 경제적인 사건, 문화와 오락적인 사건 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이란 하루가 없이 달라지고, 하루가 없이 사라지고 마는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현세뿐 아니라 영세토록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일에 대해서는 무서운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버리지만, 현세와 영세의 운명을 좌우할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인간은 잠시잠간의 인생이 끝마치면 영원한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희망과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인생은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절망과 영원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과 그 복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서 오늘의 현세와 영원한 내세에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토록 중요한 예수님과 그 복음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간혹 보면 예수님과 그 복음을 마치 액세서리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마는 자기의 목적이나 자기의 유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과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말씀하시기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가던 세속적인 삶이 변하여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생활 태도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의 변화 없이는 천국은 우리 속에 임하지 아니하고, 또한 천국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저 기독교라는 종교만 받아들였다고 해서 우리가 천국에 이른다고 하면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나의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모습이 죽고, 예수님이 내 마음과 생활 속에서 살아나야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즉 내 중심의 생활에서 예수님과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세상을 쫓는 생활에서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사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은 크리스천의 변화된 삶입니다.
이렇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현세와 내세에서 넘치도록 축복하시겠다는 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성경의 원리입니다. 또한 이 약속은 캐나다 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도 분명히 적용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곳 캐나다 땅에 축복과 행복을 추구하려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이 캐나다 땅에서 먼저 추구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희생적으로 심고 거두는 법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말씀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해서 그 집이나 부모나 처자나 전토를 버린 자는 이 땅에서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여러분, 이것은 현실적인 우리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장차 천국에 올라가서야 하나님의 상을 백배나 받을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백배나 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땅에서 축복을 백배를 받는다.’는 것은 참 좋은데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말은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집이나 부모나 전토를 버린 자’가 백배를 받는다니 이 말이 영 거리낍니다. 때로는 “야, 이것 혹시 사기 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혹 이러한 백배의 축복의 말씀을 마음으로는 믿어도 핍박을 감수해야하고, 먼저 바치고 희생을 해야 하는 조건이 붙기 때문에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을 겪습니다. 어느 누가 부모나 처자나 전토를 버리고 싶겠습니까? 어느 누가 핍박을 받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만날 내 욕심만 채워달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지 않습니까? 신앙이 성숙하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 아닙니까? 때로는 그 복음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내 현실 속에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라도 내어놓는 희생이 있어야 그것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여러분, 참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참사랑이란 내가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참사랑이란 오히려 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사랑을 주게 될 때, 그 다음 사랑이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복음을 위하여 희생의 씨앗을 심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크게 축복하실 때 먼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내놓으라고 하시지 않던가요?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란 사람에게 백세에 난 독자아들 이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 즉 죽이라고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독자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놓으라니 말이 됩니까? 물론 아브라함이 이삭만큼은 절대로 안내놓겠다고 버땡겨도 하나님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달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저주하려고, 아브라함을 슬프고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백배의 축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고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서라. 그만하면 됐다. 이제 네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니 너에게 큰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외국 땅에서 백배의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까? 희생을 감수하십시오. 그리고 때때로 무서운 핍박도 감수하십시오. 인도의 성자 사도 산데싱 예수님을 믿게 되자 그 부모가 산데싱을 타일렀습니다. “산데싱아, 내가 너에게 재산을 다 주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시키고, 네가 원하는 것 다 해줄 테니 예수를 버리라.” 그러나 산데싱은 나는 죽더라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부모님이 산데싱이 집에서 나갈 때 점심도시락을 싸주었는데 그 점심도시락에 독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생각하기를 자식이 예수 믿는 것이 집안에 큰 수치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를 믿을 바에는 차라리 죽으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산데싱은 독이 든 점심도시락을 먹고 피를 토하고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서 살아나서 세계적인 성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을 때, 때때로 핍박이 따라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캐나다 땅에서는 절실하지 않지만 우리가 선교하고 있는 북한과 같은 곳에서는 참으로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혹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미리 다짐을 하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희생의 씨앗을 심기를 요구합니다. 이것이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어떠한 농부도 심지 않고 거두기를 기대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먼저 희생적으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함이 있을 때, 어려움을 감수할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백배나 갚아 주는 역사를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3.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내세의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희생과 어려움을 감수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올라갑니다. 즉 단호한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 영생은 확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희생과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 자칫 그 신앙이 변질되기 쉽습니다. 혹은 신앙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특징은 희생과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이 열심을 내지만 순전히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고 열심을 내는 이기적인 경향이 많습니다. 자기의 입에 달면 받아들이고, 입에 쓰면 뱉어버리는 탐욕적인 신앙입니다. 마치 증권시장에서 증권의 오르고 내림을 보고 열심을 내는 것 같이 예수님을 믿어서 내 육신적인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희생과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는 신앙은 기복신앙입니다.
우리는 기복신앙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백배의 축복과 함께 내세의 영생을 확실히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물론 이에 따르는 희생과 어려움도 감수합니다. 우리는 비바람이 불던지 풍랑이 세차게 다가오더라고 결코 포기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거할 처소인 천국에 가기 위하여 절대로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영생입니다.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으로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 희생도 감수합니다. 인내하며 어려움도 이기어 냅니다. 고로 이 땅에서의 백배의 축복과 내세에서의 영생은 우리들의 손에 가까이 있습니다.